지난 12일 오후 미국 뉴욕 하이라인 공원에서 시민과 관광객들이 휴식하고 있다.　 장호정 기자

- 80년 넘은 옛 고가철로 2.4㎞
- 시민이 철거 막고 공원 추진
- 연 500만 명 찾는 명소로 키워

- 골목상권 살아나고 기업 입주
- 인파 몰리자 미술관도 둥지

빨간 벽돌집 사이로 고가(高架) 철도가 보였다. 미국 뉴욕 시 지도에 자유의 여신상 등을 프린팅한 작품을 판매하는 노점상을 지나 고가에 올랐다. 철길에 자라난 나무와 그 사이 철제 선반에 설치된 노란색 흉상. 그 길을 한가롭게 거니는 남녀와 노부부.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철길에 설치된 조형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가족. 철길 한쪽에 설치된 널찍한 나무 벤치에 누워 이른 봄 햇살과 고가 너머 허드슨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하는 뉴욕주민의 모습이 한데 섞여 한가로운 도심의 하루를 빚어냈다. 지난 12일 오후 미국이 사랑하고 세계인이 찾는 '하이라인 파크(High Line Park)'의 모습이다.

이날 하이라인에서 만난 데이비드(44·플로리다 주) 씨는 "뉴욕은 모든 면에서 미국의 중심, 세계의 중심이 될 정도로 번화한 지역이지만 하이라인 파크가 없었다면 뉴욕이라는 도시의 매력은 반감됐을 것"이라며 "언제 찾더라도 하이라인은 안식을 준다"고 말했다.

■시민의 힘으로

	공원 주변에 자리잡은 구글 뉴욕 본사.

하이라인은 길이 2.4㎞에 하늘로 9.144m 솟아 있는 고가철로로 1934년 공식 개통했다. 이 철길을 따라 화물 열차가 뉴욕 심장부를 드나들었다. 그 이후 다른 도로망이 발전하면서 화물 열차 대신 화물 트럭이 물류를 더 많이 떠맡으면서 하이라인을 달리던 열차 수는 줄었다. 1980년 냉동 칠면조를 실은 화차의 운행을 끝으로 하이라인은 폐쇄됐다. 곧 하이라인 아래의 땅을 소유한 부동산 지주들을 중심으로 '하이라인을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졌다.

1999년 하이라인의 철거 여부를 결정하는 지역 주민 모임에서 만난 프리랜서 기고가 조슈아 데이비드와 창업 컨설턴트 로버트 해먼드를 중심으로 결성된 '하이라인 친구들(Friends of The High Line)'이 이곳의 운명을 바꿨다. 이들은 '하이라인을 하늘에 떠 있는 공원이자 문화유산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에 잿빛 고가에 색을 입혀가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들이 하이라인 보존을 주장했을 때 "하이라인은 허드슨 강과 첼시를 단절시키므로 철거해야 한다" "고가 구조물은 지역사회를 양분한다"는 등 반대의 목소리가 컸다. 하지만 뉴욕 시, 뉴욕 주 철도회사, 지주, 건물주, 주민 등 다양한 관련자들의 이해관계를 조율해 10년 만에 2009년 6월 하늘공원으로 변신한 하이라인 1구간이 문을 열었다. 2011년 6월 2구간도 개장했다. 대부분 사업과 행사는 후원금으로 진행됐다.

하이라인 파크는 뉴욕 맨해튼의 서쪽에 있는 갠스부르 가에서 시작해 30번가의 허드슨 야드에서 서쪽으로 꺾여 34번가의 제비츠 컨벤션센터에서 끝난다. 이 공원은 옛 철로의 골격을 유지하면서 주변의 건물과 어울리게 설계됐다. 철길에 오랫동안 방치돼 자연스럽게 자라난 식물과 야생화가 어우러진 생태공원으로 만들어졌다. 하이라인은 도심의 휴식과 문화 공간의 역할도 크다. 뉴욕 공원 관리소와 '하이라인 친구들', 공공예술 프로젝트 기획단체인 '크리에이티브 타임'의 공동기획으로 다양한 공연과 예술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하이라인을 따라 프랭크 게리, 장 누벨, 시게루 반 등 유명 건축가들이 설계한 명품 빌딩도 감상할 수 있다.

■세계적인 핫 플레이스로

	인근 첼시마켓 안의 한국식 분식점.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도시 재생 사례로 손꼽히는 하이라인 파크는 명성만큼 찾는 이가 많다. 하이라인 친구들에 따르면 매년 500만 명 이상이 하이라인 파크를 방문한다. 절반은 뉴욕 시민이고 절반은 외국인 관광객을 비롯한 다른 지역 사람이다. 2009년 6월 하이라인 1구간이 문을 열었을 때 예상했던 방문객 수인 연간 3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하이라인 파크의 번영은 뉴욕의 주변부를 핫플레이스로 변화시켰다. 구글 뉴욕 본사를 비롯해 유명한 회사들이 하이라인 파크 주변으로 모였다. 창의적인 정신을 지닌 젊은이들이 하이라인을 걷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소비패턴에 맞춰 하이라인 파크 주변 건물은 상점과 분위기 있는 주거지로 달라졌다. 하이라인과 함께 뉴욕 시민과 관광객의 사랑을 받는 대형 과자공장을 시장으로 바꾼 첼시 마켓에는 식료품점, 서점, 아티스트숍, 한국식 분식점도 있다.

하이라인 첼시 마켓 지점에서 시작해 오 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의 배경이 된 그리니치 빌리지와 뉴욕 패션의 중심 소호로 이어지는 웨스트 13번가 등 거리의 주택 1층에는 신진 디자이너에서 유명 명품 매장까지 쇼핑 거리가 형성돼 있다. 특색 있는 커피전문점과 샌드위치 등을 먹을 수 있는 식당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뉴욕의 최고급 예술문화도 맨해튼의 뒷골목에서 꽃피기 시작했다. 지난해 4월 뉴욕 최고 현대미술관인 휘트니 뮤지엄이 하이라인에서 10m 떨어진 곳으로 이전했다. 하이라인의 매력에 동화돼 대형 미술관이 모여 있는 양지를 떠나 뒷골목으로 옮겨온 것이다.

경성대 강동진(도시공학과) 교수는 "하이라인의 재창조는 '단순하게, 야생 그대로, 조용히, 천천히'라는 도시철학에서 비롯됐다"며 "부산처럼 '화끈하고 쉽게, 빠르게'를 주장하며 폐철도를 걷어내고 인위적인 구조물을 지으려 했다면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지금 뉴욕의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장호정 기자 lighthous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