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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메디클럽

박창희 대기자의 人香萬里(인향만리) <2-3> 지역 정신을 세운 사람들- 사진가 임응식의 '망향가'

근대 사진예술 개척자, 예리하고 따뜻한 눈빛을 렌즈에 담다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6-03-27 19:22:11
  •  |   본지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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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주의 리얼리즘이란 사진 사조를 개척한 사진가 임응식.
- 부산서 태어나 유년·청년기 보내
- 생활주의 리얼리즘 사진 주창자

- 일본 유학 때 카메라 처음 소장
- 부산광화회 만들고 현상소 운영
- 종군 사진기자로 사실주의 눈떠
- 대학 강단서 많은 제자 길러내

- 거장이지만 지역에선 잊혀져
- 이제 그의 망향가를 불러줄 때


#사진예술의 명작

임응식의 대표작 '부산 아침(1946)'. 사진 제공=도서출판 나무숲
구직(1953). 모자를 눌러쓰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벽에 기대선 남자. 구직(求職)이란 글자 패널을 두르고 있다. 가슴이 찡하다. 잠깐 스치듯 보았을 뿐인데 일자리를 기다리는 청년의 모습이 오래도록 잔상으로 어른거린다. 청년실업이 애절하게 구직을 묻는다.

나목(1953). 앙상한 가지만 남은 고목 사이에 서 있는 한 아이. 강한 명암 대비로 잔가지를 제거한 벌거벗은 나무. 폭격을 당한 듯 어둠뿐인 나무와 나뭇가지. 전쟁의 황량함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럼에도 아이는 살아야 한다. 반짝이는 저 눈빛.

아침(1946). 싱그러운 아침 햇살 속으로 댕기머리 소녀들이 꽃을 이고 걸어간다. 그 뒤를 까까머리 소년이 뒤쫓고 있다. 소녀들의 뒷모습이 꽃보다 더 화사하고 활기차다. 꿈을 꽃피우는 부산의 아침이다.

이 작품들은 사진가 임응식(林應植·1912~2001)의 예술세계를 대변하는 명작들이다. 해방 직후의 어지러운 시국과 한국전쟁 직후의 가난에 찌든 삶이 순간 포착되어 생생한 역사의 기억을 불러온다. 세월은 가도 사진은 남았다. 사진의 승리다.


#잊지 못할 눈빛

어린 임응식(맨 오른쪽)과 그의 형들.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중형 임응구다.
임응식, 그는 누구던가. 셔트를 누르면 사진이 찍히듯이, 한국 사진사, 사진예술사를 들추면 첫머리에 등장하는 인물이 임응식이다. 그를 수식하는 말들은 많다. 생활주의 리얼리즘 사진의 주창자, 사진을 학문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거장, 한국 현대사진의 태두, 영상시인…. 한국사진작가협회(사협)를 만들어 사진가의 권익과 역할을 확대한 것도 그였다. 그를 빼놓고는 한국사진사를 온전히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다.

중요한 사실 하나는 임응식이 부산 출신이자, 부산사람으로서 정체성을 갖고 오랫동안 활동했다는 점이다. 그는 유년기와 청년기 모두를 부산에서 보냈고, 1940, 50년대 부산을 배경으로 적지 않은 명작들을 남겼다.

임응식은 1912년 부산 서구 동대신동 176-2번지에서 임춘화의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집안은 꽤 부유한 편이었다. 임응식이 사진관을 처음 접한 것은 1917년 나이 다섯 살 때였다. 형들의 손에 이끌려 부산 광복동 사거리에 있는 사진관에 갔다. 형들과 함께 찍은 사진 속에 꼬마 응식이 두루마기 차림에 빌린 학생모를 쓰고 놀란 눈빛으로 카메라를 보고 있다. 네모난 대형 안소니 사진기는 볼수록 신기했다. 크고 둥그런 렌즈가 사람 혼을 빼먹을 듯 노려보는 괴물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잊혀지지 않는 것은 사진사 할아버지의 예리한 눈빛이었다. 엄숙하고 경건한 그 눈빛은 응식의 가슴 깊숙이 인처럼 박혔다. 응식은 그렇게 사진을 처음 만났다.

임응식의 가족사는 다소 굴곡이 있다. 그의 형 임응구(林應九)는 부산 최초로 일본에 유학하고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하는 등 부산 근대 화단의 획을 그은 인물이다. 하지만 후에 일본에 귀화함으로써 부산화단에선 종적을 감추었다. 그와 달리 임응식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인생행로 바꾼 선물

임응식은 지금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부민공립보통학교(현 부산 부민초등학교)를 나와 중학교 진학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다. 열다섯 살에 와세다중학교에 입학한 그는 일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선물을 받는다. 사업차 만주에 갔던 맏형이 입학 선물로 카메라를 사다 준 것이다. 독일제 카메라인 '박스 탱고르'는 손안에 딱 들어올만큼 작았지만 신기하게도 사진이 잘 찍혔다.

그가 처음 찍은 것은 구덕산의 잎이 모두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오동나무였다. 찍고 나자 사진에 소질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방학을 맞아 부산 집에 돌아와 지낼 때면 산과 들을 쏘다니며 사진을 찍었고, 아버지를 졸라 만든 간이 작업실에서 현상과 인화를 하며 사진의 묘미에 푹 빠졌다.

임응식은 1931년 부산체신리원양성소(釜山遞信吏員養成所)를 수료하고, 1932~1934년 일본 도시마체신학교를 다녔다. 아마 우편이나 통신기술자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즈음 일본인 중심으로 결성된 '부산여광사진구락부'에 가입했고, 일본 '사진살롱'지에 '초자(硝子)의 정물'이 입선한다. 어렵사리 등단은 했지만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진 않았다. 일제는 문화통치를 내세워 교묘하게 문화를 억압했다. 세상은 일본 천하였다.

이후 임응식은 강릉우체국에 근무하면서 강릉사우회(寫友會)를 만들었고, 전공을 살려 1938~43년 부산지방체신국에서 일했다. 해방과 함께 주권이 회복되면서 임응식은 내면에 감춰진 사진에의 꿈을 꺼낸다. 1946년 15명을 규합해 부산광화회를 만들었고, 1년만에 회원이 150명으로 늘자 이를 부산예술사진연구회로 발전시켰다. 부산 최초의 사진현상소인 '아르스(ARS)'를 운영하며 사진 소식지도 펴냈다. 모두 부산에서 진행된 일들이었다.

한국전쟁 때 그는 종군 사진기자로 참전해 사실주의에 눈을 뜬다. 1952년 6월 서울에서 피난 온 대한사진예술연구회 회원들과 합동전을 열었고, 같은 해 12월 한국사진작가협회(사협)를 결성한다. 사협은 정기전 개최, 국전의 사진부 신설과 국제전 진출 등 한국 사진예술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대학 강단에 처음 사진을 갖고 들어간 것도 임응식이다. 부산에 피란 온 서울대 미술대학에서 사진 강좌를 창설했고, 여러 대학에 출강하며 사진학을 강의했다. 1973~78년 중앙대 사진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한국 사진계에서 최초, 최고의 수식어가 붙는 모임이나 단체, 이론 정립의 중심에는 늘 그가 있었다.


#망향의 노래

임응식은 1954년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이주했다. 이 때문인지 부산은 임응식을 잘 모른다. 기억하려 하지도, 추억하려 들지도 않는다. 인물 콘텐츠로 챙길만한 데도 관심 자체가 없었다. 중앙대에서 임응식의 강의를 듣고 그의 사진세계를 연구해 온 박희진 부산 동주대 교수는 "임응식 선생은 한국사진의 근대를 열고 사진예술의 길을 개척한 분"이라며 "이런 분이 조명이 안 되고 잊혀져 있다는 것은 한국 사진계의 손실이자 지역자원을 사장시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더 늦기 전에 그와 연고가 있는 부산 서구나 동아대 박물관 같은 데서 기념관을 만드는 등 '임응식 콘텐츠'를 선점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사진의 본질에 대한 임응식의 지론은 현장성(생활주의)과 사실성(리얼리즘)으로 집약된다. "사진가는 사진가의 눈을 가져야 한다. 어느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사진가의 눈을 가져야 한다. 그 눈만이 사물 속에서 작품을 발견할 수 있다. 사진가의 눈은 진지하고 명석하고 예리하고 경건하며 따뜻한 애정이 있어야 한다."(임응식 회고록 '내가 걸어온 한국사단' 중에서)

이 말은 세상의 그 어떤 사진철학이나 이론을 압도한다. 어릴적 본 사진관에서 뇌리에 박힌 할아버지의 눈빛이 임응식의 사진 미학으로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임응식은 평생 인간이 대면한 삶의 정황을 포착하는 카메라의 힘을 신뢰하며 살았다.

임응식의 리얼리즘 사진은 강운구, 권태균, 박희진, 이규철 등으로 계보가 어어진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권태균 전문 사진작가는 임응식에 대해 "그는 한국 사진계의 기둥을 세운 진정한 다큐멘터리 사진가였다"면서 "그의 사진에는 가슴 아픈 우리 역사가 숨어 있고 흘려버린 삶의 순간이 살아있으며 잊혀진 우리의 생활 문화가 남아있다"고 평한 바 있다.

임응식의 큰 아들 임범택(77·서울 거주) 씨는 "아버지는 부민초등학교를 나왔고 난 경남중학교 출신이다. 중구 광복동은 우리의 놀이터와도 같은 곳이었다"고 술회했다. 서울대 미대를 나와 사진가로도 활동한 임 씨는 "아버지와 나의 작품 40만여 점을 부산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싶다"면서 "집안 차원에서 '사진문화재단'을 만들자는 얘기도 나온 상태"라고 전했다.

부산은 임응식을 잊고 있었어도, 유족들은 고향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이제 부산이 작은 대답이라도 할 차례다. 누가 임응식의 '망향가'를 불러줄 것인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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