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선이 폐쇄된 자리(8.2㎞)에 만들어진 푸른길 공원에서 두 중년여성이 소녀시절을 추억하듯 양팔로 균형을 잡고 철로 위를 걷고 있다. 최승희 기자 · (사)푸른길 제공

- 옛 경상~전라 철도 시내구간
- 市 90년대 말 지하철 계획하자
- 공원화 운동 들불처럼 번져

- 시민본부 주축돼 어젠다 선점
- 2000년 결국 市가 무릎 꿇어
- 2012년 '시민이 관리' 조례까지

"폐선부지를 공원으로 만들자는 집회가 열릴 때마다 번화가 그러니까 부산으로 치면 서면 정도가 되겠죠, 그곳이 집회 참여 시민으로 꽉 들어찼을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어요. 2000년 광주시가 푸른길 공원 조성을 결정하기까지 3년간 지역의 최대 어젠다였으니까요."((사)푸른길 조준혁 사무국장)

철도 폐선부지 활용의 성공적 모델로 꼽히는 광주 푸른길 공원(8.2㎞)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다. 국내 최초로 폐선부지를 공원으로 만들었고, 기획부터 조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에 민간이 주도한 선구적 사례다. 시민이 직접 운영하도록 조례를 제정하고 맡긴 것도 처음이다.

■3년간 싸움으로 얻어낸 공원

아파트 단지 앞까지 연결된 숲길.

지난 25일 찾은 광주 푸른길 공원은 꽃샘추위에도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부터 학생들까지 도심 속 녹지공간을 즐기려는 주민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8.2㎞에 달하는 이 선형공원은 행정기관에서 기획하고 만든 것이 아니라 철도 이설 요구에서 공원 조성까지 시민이 참여해 만든 곳이어서 의미가 남다르다. 주민 최중환(60·광주 동구 계림동) 씨는 "시민이 폐선부지를 공원으로 만들려고 오랜 기간 운동을 펼쳤다. 주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부심과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도심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이곳은 1922년부터 78년간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경전선 구간이었다. 1970, 80년대 들면서 소음과 분진으로 인근 주민의 이설 요구가 잇달아 도심 외곽으로 옮겨졌다. 1990년대 후반 도심철도 이전공사가 진행되면서 이곳을 공원으로 만들자는 시민의 목소리가 본격적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광주시가 제2 도시철도 부지로 활용한다는 구상이 알려지면서 공원화를 염원하는 시민운동은 들불처럼 번졌다. 제2 도시철도 도입반대 주민결의대회, 서명운동을 비롯해 집회, 대형현수막 시위, 1인 시위 등이 이어졌다. 결국 2000년 고재유 전 광주시장은 기자회견을 열어 폐선부지의 공원화를 선언했다.

철도공사로부터 기증받은 전동차 두 량은 과거 경전선 남광주역 자리에 설치하고 주민 커뮤니티 장소로 활용한다. 현재는 리모델링을 위해 공사 중이다.

조준혁 (사)푸른길 사무국장은 "푸른길 가꾸기 시민회의를 창립하는 등 1998년부터 3년간 폐선부지 문제는 광주를 지배하는 어젠다로 급부상했다"며 "시간이 지날수록 공원화를 요구하는 시민운동이 시들해지기는커녕 열기를 더해갔고, 오히려 시의 경전철 담론이 힘을 잃어갔다"고 설명했다.

푸른길 공원 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한 '광주 푸른길 가꾸기 운동본부'는 2002년 결성됐다. 시가 공원화를 결정하고도 2년이나 예산 책정을 미루자 민간 차원의 공원조성운동을 주도하고 시를 압박했다. '100만 그루 헌수운동'에는 시민 기금 4억5000만 원이 모였다. 2003년에는 지역 건설사가 일부(필문로·535m)를 조성해 시에 기탁하기도 했다.

10년에 걸친 시민의 노력으로 푸른길 공원이 완성되면서 이곳의 운영·관리도 민간에 위탁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광주시의회는 2012년 시민 참여를 뒷받침하는 '광주시 푸른길 공원 시민참여 관리·운영 조례'를 제정했고, 현재까지 (사)푸른길이 운영을 맡아오고 있다.

■공간을 존중·배려하는 철학 필요

유례없는 폐선부지의 공원화사업이라 되돌아보면 아쉬운 점도 있다. 철길이 이전하면서 레일과 남광주역 역사(驛舍)가 함께 철거돼 과거 기차가 달렸던 흔적은 사라졌다. 공원을 찾은 사람들이 지나간 시간과 만나면서 추억할만한 매개체가 없다는 데 아쉬움이 컸다. 이에 (사)푸른길은 몇 년 전 공원 일부 구간에 철길을 새로 깔았다.

최근 또 푸른길공원을 지키려는 시민운동 바람이 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광주시가 백운광장~조선대 정문 구간에 도시철도 2호선을 놓겠다는 계획을 추진하자 보전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시는 공사를 끝낸 뒤 흙을 덮어 원래 모습으로 복원해주겠다고 설득하고 있지만, 시가 공간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조 사무국장은 "단순히 겉모습만 똑같다고 대상이 가진 의미가 같을 수는 없다"며 "시민참여로 만든 푸른길공원을 훼손하는 것은 공간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모습"이라고 말했다.

광주=최승희 기자 shchoi@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