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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희 대기자의 人香萬里(인향만리) <1-7> 예술구국의 풍운아, 한형석- 먼구름을 위한 대서사

누가 불러낼 것인가, 대륙에 묻힌 보석같은 韓中 문화콘텐츠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6-02-28 18:5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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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림합창단이 부산시민공원 내 예술촌 연습실에서 한형석 작곡의 '압록강 행진곡'을 연습하고 있다.

- 마도로스 파이프 입에 물고

- 말쑥한 양복차림에 베레모

- 청빈했지만 멋 즐길 줄 알던

- 문화예술혁명가 한형석


- '압록강 행진곡' '아리랑' 등

- 한울림합창단에서 초연

- '대지' 쓴 미국작가 펄 벅처럼

- 그의 명작·업적 재평가돼야


#한울림의 합창

부산 범전동 부산시민공원 내 예술촌 1호 연습실. 어둠을 뚫는 가로등 불빛 사이로 우렁찬 합창소리가 공원에 번진다.

'우리는 한국 독립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한울림합창단이 연습곡으로 챙겨 부르는 한형석(먼구름) 작곡의 '압록강 행진곡'이다. 연습에 참가한 합창단원은 20여 명. 서로 호흡을 맞추며 주고 받는 눈빛들이 예사롭지 않다. '나가! 나가!'하며 치고 나가는 대목에선 힘이 불끈 솟는다. 압록강 건너 백두산까지 내달리고 싶다. 김창돈 상임지휘자는 "군가의 속성상 가사가 격한데도 선율이 서정적이다. 노래를 부르다보면 한형석 선생의 마음이 가까이 다가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한울림합창단은 1978년 창단해 지금까지 300여 회의 연주회와 4장의 CD를 출반한 전통있는 민간 합창단이다. 이들은 2005년 광복 60주년을 기해 '대륙에 묻힌 이름, 먼구름 한형석'을 주제로 먼구름의 독립군가와 오페라 '아리랑' 등을 발굴하여 초연했고, 중국 베이징과 옌벤에서 특별 초청공연을 갖기도 했다. 2010년 12월 부산시민회관에서 열린 '한국 최초의 오페라-아리랑' 초연 때도 큰 역할을 했다.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압록강 행진곡'은 먼구름의 대표곡 중 하나다. 생전 먼구름은 원로들의 합창모임인 '상록수 합창단'에서 활동하며 가끔씩 이 노래를 대원들과 함께 불렀다. 당시의 에피소드 하나-. '압록강 행진곡'이 아름다운 2부 합창으로 무리없이 전개될 시점 먼구름이 제동을 걸었다. "이 노래는 그렇게 불러선 안돼요. 굶주리고 헐벗고 잠 못자는 광복군이 그리 씩씩하게 잘 부를 수 있겠어요. 힘이 들어 숨이 가빠 틀리기도 해야 노래의 참 맛이 나는 기라…. 다시 해 봅시다!"

한울림합창단 단원들도 이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하고 보면 '한울림'이 갖는 뜻이 깊다. 독립운동가 한형석(한유한)을 위한 울림, 그의 한(恨)을 풀어주는 되울림, 지역 후배들이 부르는 대합창 등으로 풀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펄벅의 '대지'와 먼구름의 '아리랑'

   
부산 서구 부민동 한형석 선생의 집에 남아 있는 유품들. 한형석 테라코타와 그의 명패, 그가 즐겨 사용한 붓과 담배 파이프가 이채롭다.
중국에서만 30여 년을 보낸 먼구름의 삶은 '대륙의 대서사(大敍事)'라 이를 만하다. 그것은 미국작가 펄 벅(1892~1973)의 '대지'를 연상시킨다. 미국에서 선교사의 딸로 태어나 부모를 따라 생후 석달 만에 중국으로 건너가 자란 소녀. 중국말을 먼저 배우고 중국 옷을 입고 중국인 학교에 다니며 중국인들의 사고방식과 문화를 체득해 1930년 세계적 명작인 '대지'를 쓴 작가.

'대지'를 발표할 당시 중국은 세계 열강들의 이권다툼 장소였다. 펄 벅은 1927년 국공내전 와중에서 국민당 정부군의 난징(南京) 공격때 온 가족이 몰살당할 뻔한 위기 상황을 경험한다. 그때 겪은 피치 못할 균열이 '대지'의 바닥에 숨겨진 테마로 흐른다. 그가 주목한 것은 세상이 바뀌어도 믿을 것은 땅뿐이라 생각한 농민이었다. 펄 벅은 자신이 본 균열을 미국인의 입장에서, 제2의 조국이랄 수 있는 중국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갖고 메워보려고 했다. 그게 바로 '대지' 3부작이다.

배경은 다르지만, 먼구름의 중국 망명과 항일 예술활동도 궤가 비슷하다. 망국의 해인 1910년에 태어나 5살 때 아버지(한흥교)를 찾아 중국 땅을 밟은 아이. 그 역시 펄 벅과 마찬가지로 한국말보다는 중국말을 먼저 배우고 중국사람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문화를 익혔다. 당시 중국인과 한국인은 '항일(抗日)'이란 공통언어를 갖고 있었다. 항일을 위해 한형석이 노래를 지으면 중국인들이 따라 불렀다. 나라 잃은 설움은 컸다. 그 간난신고의 와중에서 빚어낸 작품이 가극 '아리랑'과 '압록강 행진곡' '국기가' 같은 노래들이다. 1940년 시안에 울려퍼진 가극 '아리랑'은 대륙을 감동시킨 항전가이자 한민족의 설움을 날린 혁명극이었다.

펄 벅이기에 '대지'를 쓸 수 있었듯이, 한형석이기에 '가극 아리랑'을 만들 수 있었다. 운명적 생존 환경이 명작을 낳았지만, 사후 평가는 확연히 갈린다. 펄 벅은 '대지'로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받고 명성을 누렸으나, 먼구름의 작품들은 21세기가 될 때까지 역사의 장막 뒤에 가려져 있었다. 장르가 달라 단순비교는 무리라 해도, 한형석에 대한 저평가는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먼구름을 둘러싼 전설들

   
1980년대 초 한형석(오른쪽) 선생과 서세욱 목요학술회 회장이 만나 문화계 현안을 토론하는 모습.(서세욱 회장 제공)
먼구름은 숱한 전설을 남겼다. 그를 둘러싼 전설들은 한결같이 한 인간의 조국애와 인품, 휴머니즘을 얘기한다. 그리하여 그 전설은 마침내 진실처럼 굳어진다.

먼구름이 40년 가까이 살았던 서구 부민동의 집은 말 그대로 '하꼬방' 수준이었다. 생전에 그의 집을 방문했던 서세욱 목요학술회 회장은 "낡은 슬레이트 지붕에 세 사람이 앉을까말까한 방을 보고 난 뒤 청빈이란 단어와 함께 어떤 비애같은 걸 느꼈다"고 회고했다.

신태범 작가가 2001년 본지에 쓴 '부산문화 야사' 한 토막도 인상적이다. '(선생의 댁을 찾아) 술잔을 주고받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듣고있던 중 주위가 일순간 먹물을 부은 듯 깜깜해졌다. 얘기에 취해 미처 불 밝히는 것을 잊으신 것일까. "선생님, 날이 많이 어두운데 불을 좀 밝히시지요…" 했더니, 그가 담담히 대답했다. "어두워야 저 아래 야경을 감상하며 술 마시는 정취를 누릴 수 있다네…".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독립운동가, 음악가, 연출가, 대학교수로서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산 먼구름의 생활은 이렇듯 단촐하고 청빈했다. 신태범 작가의 회고처럼, 그는 그토록 빈한한 거처에서도 멋을 즐길 줄 알았던, 아마도 이 시대의 마지막 청빈 선비였다.

광복회 부산지부 조양제(67) 사무국장은 "한형석 지사님을 80년 초부터 알아왔지만, 그로부터 '독립운동을 했다'는 말을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장남인 한종수(56) 씨도 "아버지로부터 중국에서의 무용담을 거의 들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1975년 부산대에서 정년 퇴임한 후 먼구름은 중구 중앙동 동광동 골목에서 문화예술인들과 자주 어울렸다. 서세욱 회장은 먼구름이 자주 다닌 골목길을 어젯일처럼 기억했다. "걸어오시는 폼새가 달랐지. 양복 차림에 베레모를 쓰고 마도로스 파이프를 문채 성큼성큼 걸어와 딱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면 분위기가 달라지죠. 분위기 메이커라고 할까, 그런 기운이 흘렀어요."

그가 자주 다녔다는 술집은 동광동의 옛 대구집(현 양산박)과 옛 골목집, 그리고 현 부산포의 전신인 소레일 커피숍 등이다. 1970, 80년 때의 얘기다. 천재동 이석우 변창현 김종식 같은 예술인들과 박정인 배승원 같은 언론인들이 자리를 함께 하곤 했다. '부산포'의 전설적 주모 이행자(70) 씨는 "사흘돌이로 먼구름 어른을 봤지. 가끔 등산도 같이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먼구름이 써준 '그냥 갈 순 없잖아' 서예 액자를 가보처럼 떠받든다.

1948년 귀국 후 정부의 요직을 뿌리치고 낙향해 사재를 털어 아동극장과 야학원을 세운 것도 요즘 잣대로 보면 전설같은 얘기다. 1996년 눈을 감기 전 그는 '국립묘지에 가시라'는 주변 권유에 '그곳엔 일본 앞잡이들이 가 있어 안 간다'는 유언을 남겼다.


#깨워야 할 '여명의 노래'

'깊은 강 황량한 대지 세상이 어둠에 잠겨도/ 슬픔에 잠겨 지치지마/ 오! 긴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니/ 어둠은 이제 사라진다네/ 어두운 밤 사라진다네….'

먼구름이 작곡한 '여명의 노래'는 감성을 자극하는 서정가곡이다. 노랫말 속에 '광복'이 감춰져 있다. 광복을 맞으려면 지치지 않아야 한다. 시대와 세대를 초월해 뜨겁게 받아들여야 할 메시지다.

'여명의노래'는 중국에서 한형석 연구를 촉발한 량마오춘(梁茂春) 전 베이징 중앙음악원 교수가 좋아했다는 노래다. 량 전 교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한형석은 위대한 한국인이다. 그동안 그가 왜 묻혀 있었는지 이해가 안 된다. 그는 한중 문화교류의 아이콘이자 역사 문화 콘텐츠라 할 수 있다."

   
중국 학자들이 높이 평가한 먼구름을 우리는 오랫동안 존재조차 모른 채 지냈다. 그는 아버지를 따른 독립운동가였고, 문화예술교육의 선각자였으며, 만능 예술가이면서 지극히 인간적인 휴머니스트였다. 그는 한마디로 조국의 여명을 깨운 문화예술혁명가였다. 그를 다시 불러와 우리 시대의 혁신 콘텐츠로 활용하는 것은 이제 남은 자들의 몫이다.

※후원: 부산광역시 서구

-1부 한형석 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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