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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희 대기자의 人香萬里(인향만리) <1-6> 예술구국의 풍운아, 한형석- 만능예인의 숨결

광복군 노병 결기에 찬 붓 <헌신조국> 둥근 '國'자는 국민단결 염원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6-02-21 19:01:06
  •  |   본지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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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구름체'를 창안할 정도로 서예에 일가를 이룬 한형석의 생전 서예 작업 모습.
- 서예에서도 남다른 재능 발휘
- 힘있고 회화적인 먼구름체 창안
- 조국 헌신 꿈 담은 작품 남겨
- 민주공원 충혼탑비도 그의 글씨

- 6·25 때 전쟁고아 등 위해 만든
- 부산 부민동 자유아동극장
- 사재 털어 직접 설계하고 시공
- 영화 제작과 탈극 창작까지
   

부산 서구 망양로의 광복회 부산지부 사무실 벽에는 '獻身祖國'(헌신조국·사진)이라 적힌 편액이 걸려 있다. 먼구름 한형석(한유한)의 글씨다. 조국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한다! 그 뜻이 깊고도 무겁다. 의미도 의미지만, 필체가 힘이 넘치면서 회화적이다. 서권기(書卷氣·서책의 기운)가 묻어난다. 꾹 찍힌 점 하나에도 망치로 대못을 박은 듯 힘이 들어가 있다. 외세에, 왜놈들에게 더 이상 농락당하지 않겠다는 결기가 느껴진다.

광복회 부산지부 조양제(67) 사무국장은 "헌신조국의 국(國)자는 동그라미 형태다. 우리나라를 말하고, 모두를 뭉치게 한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고 했다. 그는 "지사님(한형석)이 쓴 글 중에 '불빈불부(不貧不富)'란 게 있는데, 이는 돈이 너무 없으면 천해 보이고, 돈이 너무 많으면 건방져서 안 된다는 의미"라며 "지사님한테서 직접 들은 내용"이라고 말했다. 문자향(文字香)의 오묘함이다.

■서권기 숨쉬는 먼구름체

   
1953년 부산 서구 부민동에 자유아동극장이 건설되는 모습. 사진 옆에 쓴 '우리 힘으로 세우자'라는 글은 한형석의 친필이다.
한형석은 서예로도 일가를 이루었다. 광복군 노병(老兵)의 서원이랄까, 못다 이룬 조국헌신에의 순명을 그는 붓끝에 찍어냈다. 한형석 글씨의 흔적은 부산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임시수도기념관 사빈당 현판, 부산대 캠퍼스 안의 '이문회우(以文會友)' 비, 대동병원 현판, 동래 금강공원 내 임진동래의총 충혼각의 주련, 부산민주공원 충혼탑비에 쓴 글, 낙동강변 이은상의 '낙동강' 시비 글씨….

한형석은 누가 원하면 아무런 대가 없이 글을 잘도 써 주었다. 결혼식 주례 때면 신랑 신부에게 '忠孝家門'(충효가문)이란 글을 적어 선물했고, 병원이 개업하면 '醫人救國'(의인구국)이란 글씨를 써 주었다. '목 잘린 난초(斷頸蘭)'도 가끔씩 그렸다. 이에 대해 그는 "일제가 우리 민족을 노예로 삼고 민족정신을 유린한 과거의 비통한 혈사를 잊지 않기 위해"라고 술회한 바 있다.

이순신 장군의 어록을 소재로 서울과 부산, 통영에서 '충무공 추모 서예전'을 갖기도 했다. 그에게 충무공은 '헌신조국'의 화신이었다. 가장 좋아한 글귀는 충무공의 칼에 새겨진 검명인 '一揮掃蕩 血染山河'(일휘소탕 혈염산하)라는 문구였다.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충무공의 '칼의 노래'는 곧 항일 광복군들의 항전가였다. 1939년 6월 중국군 공작대장으로 중조산 전투에 참가해 죽을 고비를 넘긴 한형석의 민족적 분노와 결의가 충무공의 마음과 같았으리라.

한형석의 글씨는 흔히 '먼구름체'라 불린다. 글씨에 흐르는 주조는 '애국'이다. 애국을 호소하고 몸으로 실천한 광복군 노병의 '헌신'이 뜨겁게 와닿는다. 철기 이범석 장군은 생전에 한형석의 글씨를 두고 "이채롭고 기수(奇秀)한 필법"이라 했고, 그를 아는 중국인들은 '경지에 이른 글씨'라 평가했다.

한형석의 장남 한종수(56) 씨는 "아버지의 서체는 매우 회화적이고 시사적이다. 요즘으로 치면 캘리그래피라 할 수 있다"고 했다. 한 씨는 몇 년전부터 부친의 서예 작품을 캘리그래피와 서각으로, 그의 아내 박미령(52) 씨는 퀼트(수예품)로 제작하고 있다.

■ '우리 힘으로' 세운 아동극장

   
자유아동극장은 밤이 되면 색동야학원으로 변신했다. 사진은 야학 수료식.
한형석은 중국에서 귀국하면서부터 가슴에 한가지 꿈을 품고 있었다. 극장(공연장)을 만드는 것이었다. 중국에서 항일전쟁때 예술이 그 어떤 무기보다 위력적이란 것을 알았던 터다.

1948년 12월 부산으로 낙향한 한형석은 국립극장으로 추진되던 부산문화극장이 예산 문제로 난관에 부딪히자, 사채 수백만 원을 털어 넣어 1950년 6월 18일 어렵사리 개관했다. 개관 기념공연은 '황진이와 지족선사'라는 연극이었는데, 부산 시민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그러나 개관한지 일주일만에 한국전쟁이 터졌고 극장은 국회임시의사당으로 사용됐다. 그후 연합군이 진주하면서 이곳은 미국전용위안극장으로 징발되고 말았다.

이에 굴하지 않고, 한형석은 1953년 8월 15일 그가 살던 부산 서구 부민동 판잣집 위 언덕배기에 35평 규모의 자유아동극장을 세운다. 전란으로 거리에 쏟아져나온 오갈 데 없는 고아, 부랑아, 그리고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예술 향유 공간이었다. 목수를 구할 돈이 없어 설계부터 시공까지 직접 맡아 처리했다. 당시의 사진에는 '우리 힘으로 세우자!'라고 쓴 한형석의 자필이 선명하다. 터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광복군 동지 등 주변을 도움을 받았으나, 또다시 사재를 털어야 했다.

■아동극장을 세운 뜻

   
1950년6월 부산문화극장 개관식.
한형석은 무엇 때문에 사재를 털어가며 아동극장에 매달렸던 것일까. 그의 생각은 자유아동극장 창립취지서에 잘 나타나 있다.

'…처참한 전화 중 고아원 아동과 실학(失學) 아동 등의 교도를 위하여 '극장교실'로 무료 공개하여 세인이 유기한 다음 세대 주인공의 정신적 주식물-지식과 오락-을 제공할 것이며, 암담한 거리에서 방황하는 천사에게 활기있는 광명의 앞길을 선도하며 이 민족의 병든 새싹에게 '비타민'이 되기를 자기(自起)하고 분투하려 한다…. 제네바 선언(1924년), 미국의 아동헌장(1930년), 중화민국의 아동복지강령(1946년), 일본아동헌장(1951년) 등이 제정 공포되고 있으나, 우리는 아무 것도 없다. 이 과도기의 전재 부랑아동을 위해서 급히 적절한 대책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백권의 독서보다 더 민속(敏速)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교육영화를 비롯하여 음악 아동극 무용 인형극 등으로 아동의 지식계몽과 정서 육성에 나서고자 한다…'

그가 한 일은 응당 국가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한형석은 국가를 탓하거나 말을 앞세우기보다 직접 뛰어들어 문제를 풀어냈다. 당국의 예산만 쳐다보고 일을 하는 요즘 세태를 되돌아보게 한다.

자유아동극장에서는 명작동화를 각색한 영화와 아동극, 인형극, 그림연극 등 다양한 장르가 공연됐다. 2년간 500여 회 공연에 약 12만 명이 무료 관람했다니 엄청난 성과다. 여기서 공연된 많은 작품들은 또다른 관점에서 국내 아동극의 효시라는 공연사적 의의를 갖는다.

자유아동극장은 밤이 되면 색동야학원으로 변신했다. 가족을 잃은 전쟁고아들과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 무취학 아동 90여명이 매일 밤 배움의 대열에 합류했다. 아동극장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 그것도 전란기에 아동 문화예술교육의 길을 연 것은 선구자적 활동이다.

하지만 자유아동극장과 색동야학원은 2년 만에 문을 닫고 만다. 재정난 때문이었다. 독지가들의 성금과 봉사만으로 극장을 꾸려나가는 데는 한계가 따랐다. 어쩔 수 없이 문을 닫아야 했던 그때의 일은 한형석에게 두고 두고 회한으로 남았다.

■탈극 '순절도' 속의 창들

귀국 후 한형석은 영화 제작에도 손을 뻗었다. 6·25 전란기인 1951년 그는 지역의 예술인들과 함께 경남도의 후원을 얻어 세미 다큐멘터리 영화 '낙동강'을 만든다. 사진작가였던 김재문이 제작을 맡고, 한형석과 당시 경남도 문화계장이던 서양화가 우신출이 진행과 기획을 담당했다. 원작은 시인 이은상, 각본 편집은 전창근이 맡았다. 영화에 삽입된 '낙동강'이란 노래는 이은상이 짓고 부산사범학교 교사였던 윤이상이 작곡했는데, 당시 "이 노래를 모르면 경남도민이 아니다"고 할 정도로 널리 애창됐다. 이 영화는 1952년 2월 부민관에서 개봉됐다.

1955년부터 부산대 강단에 선 한형석은 60년대 들어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의 일을 돕는다. 1967년 3월 하인리히 뤼브케 서독 대통령의 부산방문 행사와 1972년 제1회 부산시민의 날 행사를 한형석이 기획했다는 것은 그의 숨겨진 면모다. 부산의 1세대 기획자로서 지역 문화콘텐츠 창출의 으뜸자리에 그가 자리해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중국 경극과 한국 가면극을 비교 연구하고, 1969년 정초엔 새로운 형식의 '탈극 순절도'를 발표한다. 임진왜란 때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의 이야기를 총 여섯 과장으로 다룬 이 작품은 탈극의 전통을 살리면서 현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극 중에는 '사냥가' '수심가' '살신성인가' 같은 창작 창이 다수 포함돼 있다. 한형석의 진가가 모처럼 발현된 모습이다. 하지만 '탈극 순절도'는 아쉽게도 여태껏 무대화되지 못했다. 지역문화계가 그의 잠자는 탈극을 깨워 춤추게 할 수는 없을까.

※후원: 부산광역시 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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