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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희 대기자의 人香萬里(인향만리) <1-5> 예술구국의 풍운아, 한형석- 대륙에 뿌린 예술의 씨앗

전쟁고아 모아 예술교육…훌쩍 큰 중국인 제자들 "당신이 그립습니다"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6-02-14 19:38:37
  •  |   본지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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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중국 시안에서 한유한의 노(老) 제자가 스승을 위한 추모공연을 가진 후 기념촬영을 했다. '한유한, 시안 인민들이 당신을 그리워합니다!'라는 문구가 매우 인상적이다. KBS 화면 캡처
- 보육원 아동예술반 이끌며
- 음악가 등 유명 예술가 키워내
- 군가 보급과 선무활동도 매진

- 한국 정서 녹인 창작활동 병행
- 부민동 '자유아동극장' 토대 된
- 中아동극장서 예술적 이상 실현

- 제자들 스승 가르침·체취 기억
- 2009년 시안서 추모공연 마련
- 기념촬영 플래카드 감동 물결

사제 간의 정은 때때로 애틋한 휴먼 스토리를 낳는다. 혹독한 시기, 스승의 가르침이 인생행로의 나침반이 되었을 때 제자는 두고 두고 그 정을 새긴다. 동양의 인문 전통은 그러한 사제 간의 정을 사상으로까지 승화시켰다.

한유한은 여느 독립운동가들과 달리, 중국에서 항일 예술활동을 하며 많은 제자를 가르치고 키웠다. 그것도 항일전쟁이란 전시(戰時)에 고아들을 데리고서. 그 제자들이 오늘날 중국 문화예술계의 한 축을 떠받치고 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중국인들조차 의아해한다. 한유한 예술인생이 감춘 비밀이 아닐 수 없다. 그 비밀은 중국 시안(西安)의 한 보육원에서 잉태된다.

■섬서성 전시 제2보육원

   
1940년초 한유한이 섬서성 전시 제2보육원에서 전쟁 고아들에게 악기를 가르치는 모습. 한유한은 이곳에서 많은 창작곡과 가극을 만들었다.
1937년 7월 대륙에서 중일전쟁이 터지자 각지에서 전쟁고아들이 쏟아졌다. 한국 광복군들도 전쟁터 전후방에서 중국 중앙군과 연합전선을 형성해 싸웠다. 이 즈음 중국군은 국공합작 차원에서 시안에 섬서성(陝西省) 전시(戰時) 제2보육원을 만들었다. 전쟁고아들을 수용, 보호, 양육하는 시설이다. 당시 중국 국민당 장개석 군사위원장의 부인 송미령(宋美齡) 여사가 깊이 관여했고, 국민당 간부인 피이서(皮以書) 여사가 원장을 맡았다.

한유한은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이곳에서 아동예술반 지도교사 주임으로서 중국인 음악가, 화가 등 유망한 청년예술가들을 이끌고 이 사업에 깊이 참여했다. 이 보육원에는 300여 명의 전쟁고아들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그 중 예술적 재능이 있는 아이 20여 명을 따로 모아 예술반을 조직하였고 그 책임자가 한국청년 한유한이었다. 한유한은 송미령, 피이서 등 국민당 요인들과 가까워질 수 있었고, 자연스레 광복군 활동의 연계고리가 되었다.

한유한이 바빠졌다. 중국 국민정부 간부훈련단 제4단, 일명 간사단(幹四團)의 음악교관과 광복군 예술조장을 겸하면서 섬서성 제2보육원 예술반 주임까지 맡아야 했으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간사단에서는 조회 때마다 연단에 올라 1만여 명이 도열한 가운데 '중국 국가' 제창을 지휘했다. 중국 국가가 울려퍼질 때 함께 자리한 한국청년간부훈련반(한청반) 대원들은 시무룩할 수밖에 없었다. 나라 잃은 청년들은 국가도 마음 놓고 부를 수 없었다. 한유한은 휴식시간에 한청반 동지들을 불러 모아 애국가를 부르며 설움을 삭였다.

군가를 만들어 보급하고 선무활동을 하는 것도 한유한의 몫이었다. 그런가하면 시안에서 아동극장을 창설해 운영했고, YMCA합창단을 지휘하고 연극 활동까지 병행했다. 일인다역 만능 예술인의 면모였다.

■'한·중 정서'의 절묘한 혼합

   
중국연극학회 대원들과 찍은 사진. 앞줄 왼쪽이 한유한.
보육원 예술지도 교사 시절은 한유한 예술인생의 절정기였다. 이때 그가 작곡한 '섬서 제2보육원 원가'는 지금까지도 불리는 명곡이다. '포화가 거센 지역에서/ 우리의 아버지는 전방에서 전사하고/ 우리 어머니는 공장에 나가셨네/ 이제부터 부모를 잃은 우리에겐/ 보육원이 우리의 어버이라네…'.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당시 전쟁고아들의 막막한 처지가 절절하게 와닿는다. 장조와 단조가 적절하게 섞인 이 노래는 한국적 정서가 배어 들어 '한중 음악이 혼합된' 특징을 보여준다.

이 시기에 한유한은 동화가극 '어린 양들(小山羊)', 낭송극 '집없는 아이(沒家的孩子)', 가무극 '승리무곡(勝利舞曲)' 같은 작품을 빚어냈다. 한유한은 이들 작품을 보육원 강당에서 수시로 공연하는 한편, 중국 국민당과 우리 임시정부 요인, 외국인 방문단이 시안을 찾을 때 특별공연 형태로 선보여 큰 반향을 얻었다.

한유한의 또다른 아동가무극 '낙원행진곡(樂園進行曲)'은 중국의 음악사학자 양무춘(梁茂春) 전 베이징 중앙음악원 교수가 "한유한의 예술적 결정체"라고 높이 평가한 작품. 항전 시기 부모를 잃고 고향을 떠난 아이들의 역경을 그린 이 작품은 책으로도 출판됐다.

이들 작품을 공연할 때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와 광복군 제2지대가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무대설치에서 무대의상, 악단 반주에 이르기까지 한국 대원들의 세심한 손길이 닿아 있었던 것. 한국과 중국은 일제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연대해야 했고, 이국에서 나라를 구해야 했던 한국 애국지사들은 중국 측의 도움이 필요했다. 한유한은 그 중심에서 창작과 연출, 섭외 등 제반 작업을 총괄했다. 결국 보육원 봉사활동과 창작 작업, 공연활동은 모두 한유한의 예술구국, 즉 독립운동이었던 셈이다.

한유한은 1944년 시안의 보육원에 중국아동극장을 설립해 예술적 이상 실현을 위해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러나 한유한의 보육원 활동은 이듬해 여름 일제의 패망과 함께 끝난다. 일제의 패망이 늦어졌더라면 한유한이 더 높은 예술 고지를 점했을 지도 모른다. 시안에 설립한 중국아동극장은 한유한이 귀국 후 부산 부민동에 세운 '자유아동극장'의 틀이었다. 6·25 전란 직후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거두어 전시 예술교육을 실천했다는 점에서, 중국 시안과 부산은 전시 예술교육의 소중한 원형을 공유한 도시다.

■스승에 대한 그리움

   
한유한의 가무극 '승리무곡'을 공연한 후 출연진이 함께 한 모습.
중국의 전쟁 고아들에게 어렵사리 가르친 예술교육은 희망의 메시지를 품고 속속 꽃을 피웠다. 한유한이 4년 가량 지도한 섬서성 전시 제2보육원 아동예술반 출신 가운데는 성공한 인물이 적지 않다. 지금까지 파악된 주요 인물만 신중국 초기 국가급 음악가가 7명, 화가 1명, 의과대학 교수 1명 등 10여 명에 이른다.

대표적 인물은 양문량(梁文亮·화가) 전 시베이대학(西北大學) 교수, 고경화(高經華·바이올리니스트) 전 중앙악단부단장, 표세정(表世正·바이올리니스트) 전 남경군구가무단 단장, 양기(楊祺) 전 시안예술학교 교장 등이다. 모두 80~90세의 노인이 됐지만 하나같이 소싯적 한국인 스승 한유한을 잊지 않고 있다.

1945년 10월, 임시정부의 명에 따라 한유한이 대원 3명과 함께 지난(濟南)특파원으로 떠날 때 이들 제자는 스승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면서 자신들이 그린 판화를 한유한에게 선물했다. 그 귀한 선물을 한유한의 장남 한종수 씨가 간직하고 있다.

사제 간의 끈끈한 정은 2012년 광복절에 맞춰 한 방송사가 제작한 특집방송과 2014년 부산 서구청의 의뢰로 용역을 수행한 동아대 연구진의 면담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시안과 베이징, 홍콩 등지에 거주하는 한유한의 제자들은 70여년 전 스승의 가르침과 체취를 기억하며 감회에 젖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스승 한유한이 다재다능했으며 음악 천재였고 가르칠 땐 부모님처럼 엄격했다"고 술회했다. 한유한의 창작 가극 '아리랑'이 공연될 때 피아노 반주를 맡았다는 양기(1929년 생) 씨는 카메라 앞에 서서 '섬서 제2보육원 원가'를 부르며 눈시울을 적셨다.

시베이대학 교수를 지낸 장인(張引·1918년 생) 씨는 2009년 시안의 원리대학 대강당에서 열린 '제2차 세계대전 승리 64주년 기념- 한유한 추모공연'을 화제로 올렸다. 그때 한유한이 1940년 만든 '농촌무곡' 등 9곡이 장인 씨의 지휘 아래 재현됐다. 공연장은 묘한 긴장감과 벅찬 감동이 물결쳤다. 공연이 끝나고 출연진 기념촬영 때 장인 씨가 플래카드를 하나 펼쳤다. '한유한, 시안 인민들이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제자 양문량(1930년 생) 씨는 오늘날 중국 화단을 주름잡는 유명한 수채화가다. 어린 나이에 양친을 잃고 1941년 11살에 제2보육원에 들어간 그는 한유한에게서 미술지도를 받았다. 그는 1993년 2월 스승 한유한에게 편지 한통을 보낸다. 안부와 함께 옛 은사를 찾은 기쁨을 전하며, 수소문한 끝에 중국의 제자 7명이 연락되었으니 중국을 한번 방문해 달라는 요지의 글이었다. 편지를 받고 한유한도 다소 들떠 중국 방문을 준비했으나 발병으로 병석에 눕게 되면서 사제 상봉은 이뤄지지 않았다.

   
중국의 제자들이 그리워하는 한유한은 지금 한국의 어디에 있는가. 한유한의 독립운동은 커녕 아직 그의 이름조차 모르는 이가 많은 현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중국서 불린다는 그의 노래들은 언제쯤 들어볼 수 있을 텐가.

※후원: 부산광역시 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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