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궂은비 내리는 그 밤이 애절구려." 국민가요 '번지없는 주막'의 첫 구절이다.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절, 동포들의 삶을 유랑민에 비유한 노래라서 더욱 가슴에 와 닿는지 모른다. 실제로 사람이 사는 집이 어디 이 노랫말처럼 문패와 번지수가 없겠는가. 그렇지만 이 노래가 불려지기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그러니까 때는 1895년 갑오개혁 바람이 부산항에도 한창 불어닥쳤을 적 일이다. 한 해관원이 문패를 달지 않았다는 이유로 갑자기 조선경찰에 체포돼 투옥됐다. 이 사건이 터지자 곧 부산해관장은 해관총세무사(현 관세청장) 앞으로 부산항의 동향보고서를 올렸는데, 보고서에 드러난 사건의 진상은 이러하다.

1895년 5월 13일 오후 3시께였다. 부산해관의 행정보조 외근직원 박수오가 신설된 조선경찰에 의해 길거리에서 불시에 체포돼 관아로 끌려가 하루 밤낮을 엄지손가락이 결박된 상태로 칼을 뒤집어쓰고 구금이 되었다가 저녁 늦게 풀려났다. 혐의는 자신의 오두막집 대문 위에 이름 등을 기재한 문패를 달아야 한다는 새로운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박수오는 "큰 집을 소유한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필요한 정보를 담은 통지서를 받고서 대문 위에 문패를 달도록 지시를 받았지만, 본인은 관헌으로부터 '그렇게 하라'는 아무런 지시를 받지 못했다"고 항변했다. 뒤에 자기 직원이 억울하게 구금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부산해관장 헌트(何文德)는 "본인의 권위와 해관 및 공공의 편익은 완전히 무시한 처사"라고 비난을 하면서 "신설 경찰이 취한 이런 무례, 무단, 고압적인 업무방식에 대해 우려가 크며,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해 경찰권 남용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표명했다.

그 당시 헌트 해관장은 영국 명예영사 직함에다 부산해관장직을 7년째 하고 있으면서 유창한 우리말 실력에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꿰뚫고 있는 부산의 유지급 인사였다. 그리고 당시 부산항 경찰관으로서 이러한 개혁의 채찍을 휘두른 사람은 부산의 근대 선각자인 일본어역관 출신 박기종이었다. 이 사건이 파문을 일으키자 당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현 외교통상부)의 감찰로서 부산항에 내려와 있던 조중응(趙重應)은 직접 박기종을 조사하고는 오히려 격려를 할 정도였다. 더구나 이 사건은 근대적 우편제도인 우체사가 설치되는 제3차 갑오개혁(을미개혁)기에 일어난 것으로서 문패달기가 빨리 제자리를 찾으려면 약간 무리수가 따르더라도 박수오와 같은 공직자를 구금시킴으로서 더 큰 파급효과를 노렸는지 모른다.

이어서 1895년 6월 3일 자의 동향보고도 관심을 끈다. 여기에는 조선 내 모든 계층에서 사용하던 긴 담뱃대(장죽)를 6월 1일 자로 금지하고, 1피트(30㎝) 길이의 짧은 것(곰방대)만 허용이 되었다. 부산항의 경찰복장이 순찰코트와 바지로 이뤄진 반(半)유럽풍에 조선인 가마꾼 모자와 같은 것을 쓰고 짚신을 신었는데 무겁고 긴 기병 칼로 무장하였다고 했다. 또한 흰옷 착용이 금지되면서 향후 검은 색 계통의 옷을 착용토록 하는 포고문이 나붙었다고 했다.

갑오개혁은 봉건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조선사회 내부의 자율적 개혁이긴 했지만, 일본의 영향력이 우리나라에 미친 최초의 개혁이었다.

 부산세관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