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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희 대기자의 人香萬里(인향만리) <1-2> 예술구국의 풍운아, 한형석- 음악혁명가의 노래

항일 음악의 전사, 그의 무기는 가슴을 뛰게한 노래였다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6-01-17 18:52:44
  •  |  본지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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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창설 모습. 맨 왼쪽이 한형석이다.
- 소련 스탈린 공포정치에 맞선
-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처럼
- '신혁명군가' 써 중국군에 보급

- 혁명기조 속에 서정성 감춰진
- 1943년 '압록강 행진곡' 대표적
- 초등4학년 음악교과서 실리고
- 친일인명사전 모금운동에 사용

- 산복도로변 허름한 유가족의 집
- 애국지사 '한형석 기념관'인 셈


#음악과 혁명

   
1943년에 나온 '광복군가집' 제1집에 수록된 한형석 작곡의 '압록강 행진곡'. 악보가 아닌 숫자보로 적혀 있으며 등록문화재 제474호이다.
1980년대 한국. 대학가에서 은밀히 유통되던 카세트 테이프 가운데 '혁명'이라는 게 있었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의 교향곡 5번 D단조. 압권은 4악장이다. 우르릉 꽝! 우뢰와 같은 장엄한 화음과 비극적이면서 애상적 분위기가 듣는 이를 사로잡는다. 당시에는 몰래 들어야 하는 음악이었다. 호기심 많은 대학생들은 숨어서 듣는 것만으로 쾌감을 느꼈고, 음악이 주는 은밀한 마력에 빠져들었다.

1930년대 소련. 스탈린의 공포정치는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옥죄었다. 이념과 체제의 잣대가 난무했다. 찍히면 바로 숙청이었다. 문화 예술은 어둠 속에서 낙관주의를 설파해야 했다. 촉망받던 젊은 작곡가 쇼스타코비치가 1937년 11월 발표한 교향곡 5번은 표면상 스탈린 압제에 대한 음악적 저항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관변 비평가들은 '낙관적 비극의 전형을 그렸다'고 호평했다. 시대의 장난이 혁명 음악가를 지킨 셈인가. 훗날 쇼스타코비치는 제자에게 "우리는 음악의 전사들일세. 어떠한 바람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아 인간을 옹호해야 하는 전사들이지"라고 말했다.

1930년대 중국. 일제는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대륙 침략을 노골화하고 있었다. 한민족에 대한 탄압과 수탈 행위도 극에 달했다. 상하이 신화예술대학을 졸업한 한형석은 산둥성 무훈중학교 예술 및 영어 교사로 근무하며 작곡 활동에 몰두한다. 1934년 처음으로 작곡한 '신혁명군가'는 발표 즉시 중국 전군(全軍)에 보급되었다. 이 군가는 중국인들에게 항일운동을 혁명으로 인식하게 하고 흩어진 중국인들이 단결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때부터 한형석은 예술구국의 길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다. 처음엔 중국 군가를 지었지만 곧장 '압록강 행진곡' '국기가' '광복군 제2지대가' '조국 행진곡' 등 광복군을 위한 곡들을 연이어 작곡한다. 이들 작품은 사실 아시아 불멸의 군가 목록들이다. 다만 저평가돼 있는 것이 아쉬울 뿐.

혁명을 기치로 한 그의 작품 활동은 1940년 무대화된 창작 오페라 '아리랑'으로 꽃을 피운다. 매스컴의 찬사 속에 한형석은 중국에서 항일 혁명의 아이콘으로 떠오른다. 그의 혁명은 조국독립을 겨냥한 것이었고, 혁명 도구는 바로 음악이었다. 한형석은 이때 쇼스타코비치의 '혁명'을 가슴으로 듣고 있었으리라.


#'무엇을 위해'라는 물음

   
부산 서구 부민동 산복도로변에 위치한 독립운동가 한형석의 집. 전면에 보이는 텃밭이 1950년대 자유아동극장과 색동야학원이 들어섰던 곳이다.
한형석은 무엇을 위해 이국 땅에서 혁명에 몸을 던졌던 것일까. 항일, 구국, 독립, 예술혼, 청춘, 인간, 효도…. 어느 것을 갖다붙여도 말은 되겠지만, 그의 속내를 간파하는 일은 여전히 조심스럽다. 생전 그는 자신을 '광복군 노병(老兵)'이라고만 했지, '무엇을 위해'란 물음에는 말을 극히 아꼈다. '무엇을 위해' 무엇을 했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진심에 닿지 못하거니와 그가 바라는 바도 아닐 터이다.

서슬퍼런 항일 혁명시대를 음악을 무기로 건너온 한형석에게서 쇼스타코비치를 읽게 되는 것도 이 대목이다. 스탈린 폭정을 거쳐야 했던 쇼스타코비치나 일제의 잔악한 침탈을 겪어야 했던 한형석에게 '혁명'은 삶의 가치, 인간됨을 실현하는 과제였다. 이는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아 인간을 옹호하면서 전사가 되어야' 하는 이유기도 하다. 이들은 음악 혁명가였고, 혁명 음악의 전사들이었다.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쇼스타코비치가 한형석의 혁명 군가를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실로 궁금해진다.

이들은 음악 속에 혁명이 움트고, 혁명 속에 음악이 자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음악은 인간의 마음과 의지를 표현하는 매우 추상적인 예술이다. 그 추상성이 때때로 음악의 힘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의지를 담은 섬세한 표현과 감성적 뉘앙스는 음악만이 가질 수 있는 마력이다. 이를테면 혁명이 숨어 숨쉬기에 음악만큼 좋은 공간도 없다. 1930~40년대 소련과 중국, 한반도는 부글부글 끓는 용광로와도 같았다.

한형석은, 쇼스타코비치가 그렇듯이 끊임없이 솟아나는 음악의 샘을 가지고 있었다. 그 샘은 인간 옹호, 인간 회복의 오아시스였다. 하지만 세계 음악사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혁명'만 기억할 뿐, 한형석의 '혁명'은 말하지 않는다.


#'압록강 행진곡'을 다시 부르며

한형석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군가와 가극 등 100여 편을 작곡했다. 최고의 히트곡은 1943년 중국 시안에서 작곡한 '압록강 행진곡'이 꼽힌다.

'우리는 한국독립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동포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고향에/ 등잔 밑에 우는 형제가 있다 원수한테 밟힌 꽃포기 있다/…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노래를 듣노라면 가슴이 찡해지고 울컥하는 마음이 주먹을 불끈 쥐게 한다. 힘차고 서정적인 가사와 강건하고 절제된 곡조. 도탄에 빠진 동포와 형제를 구해야 한다는 광복군의 바람이 절절히 전해져온다. '나가! 나가!' 하고 외칠 땐 절로 기운이 분출한다. 중국의 음악사학자 량마오춘(梁茂春) 전 베이징중앙음악원 교수는 "혁명기조 속에 감춰진 서정성은 한형석 음악의 특징이자 중국 음악과도 다른 점이다"고 설명한다.

'압록강 행진곡'은 널리 알려지지 않은 노래인데, 2003년부터 초등학교 4학년 음악교과서에 실리면서 국민 군가처럼 바뀌었다. 이 노래는 한국사회가 길을 잃고 헤맬 때 방향타가 되기도 했다. 2004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려고 할 때다. 친일파 후손들이 알게 모르게 저항해 자칫 사업 자체가 무산될 수 있었던 상황. 한 네티즌이 간절하게 국민적 모금운동을 호소하며 배경음악으로 '압록강 행진곡'을 올렸다. 노래 속의 '나가! 나가!'란 외침에 네티즌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게시글에는 '독립군 진공작전, 팔도 독립군은 거병하라'는 구절과 함께 민족문제연구소의 계좌번호가 적혀 있었다. 젊은 네티즌들에게 '압록강 행진곡'의 강건한 음율과 가사는 하나의 신선한 충격이었다. 5억 원이 모아졌다.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염원을 담은 작은 물방울 하나가 큰 바위를 뚫은 격이었다.

한때, 운동권 가요의 상징인 '임을 위한 행진곡'이 '압록강 행진곡'을 표절한 것이 아니냐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두 노래를 같이 들어보면 음율과 진행이 상당히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불후의 명곡은 서로 통하는 것인가. 두 노래 모두 한국 역사를 바꾼 혁명가요라 그런지, 표절 시비는 제풀에 잦아들었다.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압록강 행진곡'을 작곡한 한형석은 1996년 87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혁명의 텃밭엔 잡초만 무성

먼구름 한형석은 망국의 해인 1910년 2월 21일 동래구 명륜동에서 한흥교(韓興敎)와 이인옥(李仁玉)의 4남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한형석은 태어나서 6살이 되도록 부친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일본 유학을 하고 의사가 된 부친 역시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혁명군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 7살때 어머니와 형, 숙부와 함께 상하이로 간 한형석은 대륙에서 '혁명'을 노래하다 1948년에야 조국으로 돌아온다.

한형석이 살던 집은 부산 서구 부민동 임시수도기념관 뒤 산복도로변이다. 그는 1950년대 중반부터 줄곧 이 집에서 살았다. 이곳엔 지금 부인 강호정(95) 여사와 장남 한종수(56) 씨 내외가 살고 있다. 2013년 말 부산시가 산복도로 르네상스 사업의 일환으로 독립운동가의 집으로 단장해 겉으론 산뜻해 보인다.

그러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허름한 안채를 안은 허다한 산복도로 집일 뿐이다. 어디선가 핸드폰 벨이 울리고 '압록강 행진곡'이 흘러나온다. 한종수 씨의 핸드폰이다. 부친 별세후 한 씨는 방 한칸을 확보해 부친의 유품을 꼬깃꼬깃 모아두고 있었다. 조부가 3·1 운동때 흔들었다는 태극기와 중국에서 주고 떠난 조국의 흙 한줌도 가보처럼 보관돼 있다. 이를테면 이곳이 '한형석 기념관'인 셈이다. 쓸쓸한 기분을 억누르고 바깥으로 나오자 언덕빼기에 꽤 넓직한 텃밭이 펼쳐져 있다. 겨울이라 그런지 텃밭의 잡초들이 말라비틀어져 있다. "이곳이 아버님이 세운 자유아동극장과 색동야학원이 있있던 자리죠. 복원사업을 필요한 곳인데…." 한 씨는 말끝을 흐렸다. 하늘 높이 먼구름이 떠다녔다. 애국지사이자 문화예술 혁명가이며 교육 선각자가 살다간 곳이 이토록 초라하고 쓸쓸해야 하다니! 이곳이 진정 '혁명'이 필요한 건 아닌가. 한형석, 그의 혁명의 노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후원: 부산광역시 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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