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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희 대기자의 人香萬里(인향만리) <1-1> 예술구국의 풍운아, 한형석- 그냥 갈 수 없잖아

총·칼 대신 예술을 무기로 동아시아 평화의 씨앗 심다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6-01-10 18:52:35
  •  |   본지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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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한형석이 중국에서 가져온 태극기.
- 중국서 항일운동, 광복 후 귀국
- 전우·중국 혈육을 가슴에 새겨
- 관직 진출 않고 부산으로 귀향

- 대폿집 '부산포' 서예작품 남아
- "먼구름 할배는 우리 단골이었제"
- 이행자 주모 40년 전 모습 회상

#한강변의 상념

1948년 9월 10일 한강 변. 한형석(먼구름)은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겼다. 한강이 흘러드는 서해, 가뭇없는 바다 저쪽의 기별에 마음이 끌린다. 서해와 연한 중국의 해안도시 칭따오(靑島)에서 두달 전 간신히 배를 탔었다. 두고 온 이국(異國). 찾아 온 조국. 중국에서의 지난 활동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한형석은 평소 습관대로 펜을 꺼내 시를 끄적인다.



'태행산 왜적에 벗들이 전사하여(敵後太行亡戰友 적후태행망전우)

장안 밤비에 의병들은 수심에 젖었네(長安夜雨義兵愁 장안야우의병수)

반백머리로 돌아와 한강수 다시 마시니(秋霜貴飮漢江水 추상귀음한강수)

백두산은 보이지 않고 강물만 외로이 흐르누나(不見白山水自流 불견백산수자유)'



그 순간, 강물 위에 그리운 얼굴들이 어른거렸다. 조국 광복을 애타게 기다리다 비명에 간 전우들, 중국의 음악 동지들과 제자들, 부산에 있는 부모님과 친지들, 그리고 어릴 적 놀던 친구들…. 다시 눈을 감았다. 두고 온 중국 가족들의 얼굴이 동그마니 떠오른다. 머리를 흔들어 잊으려할수록 또렷이 떠오르는 혈육들. 가슴이 아려온다.

태행산, 그곳은 삶과 죽음이 처절하게 포개지던 계곡이었다. 함께 죽기로 맹세하고 일본군과 맞서 싸웠던 많은 전우들이 돌아오지 못했다. 그들을 잃은 채 맞이한 광복이 어찌 감격일 수 있고, 황망하게 찾아온 조국이 어찌 개선(凱旋)일 수 있는가.

한형석은 쉼호흡을 하고 다시 바다를 본다. 나이 서른여덟, 중국 망명생활 31년 만에 다시 찾은 조국. 그런데 조국은 이념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두 동강이 날 상황이다. 압록강이 멀어져가고 백두산이 가물거린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붉음을 토하는 노을빛을 받아 한형석의 얼굴도 붉어진다.

#마지막 귀국선을 타고

   
부산 중구 중앙동 '부산포'에 걸려 있는 한형석의 서예 작품 '그냥 갈 수 없잖아' 앞에서 이용득(왼쪽) 부산세관박물관장과 한형석의 큰 아들 한종수 씨가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부웅~. 뱃고동이 울렸다. 정든 칭다오를 떠나야 할 시간이다. 육중한 미군 상륙정(LST)이 시동을 건채 마지막 승선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국내 사정을 봐가며 천천히 귀국하겠다고 마음을 굳혔으나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갔다. 미 군정청의 중국동포 귀국 수송책임자로 있던 이재현이 급보를 보내왔다. "마지막 귀국선이 출발하니 무조건 타시게. 자네의 노모가 귀국을 애타게 기다리네." 이재현은 한국청년전지공작대 공작조장 출신으로 한형석과 친분이 있었다. 노모가 기다린다는 말에 흔들리던 마음이 정리된다. 잘 있거라 칭다오, 부디 잘 계시오-. 한형석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 배에 몸을 실었다.

광복군으로 활동한 한형석은 해방이 되면서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았다. 광복군 제2지대 정훈처 중교과장으로 중국에 흩어져 있던 동포들을 모으고 일본군에 끌려갔던 한국 군인들을 접수하여 조국으로 보내는 임무였다. 1946년 3월 한형석은 수년간 머물렀던 시안(西安)을 떠나 산둥성 지난(濟南)의 연락주임으로 임명되었고, 이듬해에는 국립산동대학 훈도처 과외활동조 지도원으로 근무했다.

배가 출항했다. 멀어져가는 칭다오 어딘가에서 '그녀'가 울고 있을 것이었다. 가슴이 쓰라렸다. 한형석의 내면 깊숙히 감춰진 한(恨)은 여기서 배태되어 그의 삶을 관류하는 묵시의 인자로 작용한다. 그는 공 사석 어디에서도 중국에 두고 온 여인과 그 가족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다. 이국에 두고 온, 만날 수 없는, 만나지 못한 쓰라린 운명을 속으로 삭인 것이다. 시대상황이 빚은 기막힌 운명이었다.

인천항에 도착한 한형석은 여느 귀환동포들과 마찬가지로 월미도 수용소에서 1주일간 머물렀다. 첫날밤을 뜬눈으로 보내고 이튿날 검역을 받던 한형석에게 특별면회 신청이 들어왔다. 당시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직을 수행하던 이범석 장군의 부인 김마리아 여사였다. 철기(鐵驥) 이범석 장군은 북로군정서 연성대장으로 청산리전투를 이끌었고, 광복군 활동 당시 누구보다 한형석을 아꼈다. 광복군 제2대대 단체사진에도 이들은 나란히 모습을 드러낸다.

서울의 자택에서 한형석을 맞은 이범석 장군은 "이 짐승같은 사람아, 연락도 없이 그리도 무심했던가"라며 원망을 쏟아냈고, 1개월 간 한형석을 묵게 하면서 "뭘 해볼텐가"라며 관직 또는 예술 분야의 요직을 권유했다. 그러나 한형석은 광복군 활동을 한 대가로 정부의 중요 관직을 맡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며 극구 사양했다. 한형석은 서울 중앙방송국의 촉탁위원으로 잠시 이름을 올려 두었다가 곧 귀향했다. 그의 삶에 있어 최대 분수령이었다.

#그냥 갈 수 없잖아

   
중국 육군군관학교 교관 시절의 한형석.
원도심의 원도심이라는 부산 중구 동광동 백산기념관 아래 골목에는 '부산포'라는 아주 오래된 술집이 있다. '전설적인 주모' 이행자(70) 여사가 50여년의 시공간을 잇대고 덧대 어렵사리 운영해온 대폿집이다. '부산포'에 들어서면 오른쪽 벽면 가득 예술인들의 작품과 낙서가 붙어 있고, '그냥 갈 수 없잖아'라는 서예 액자가 한눈에 들어온다.

"저기이 바로 할배가 써준 기지. 먼구름(한형석) 할배는 우리집 단골이었제. 40년도 더 됐어. 무슨 뜻이냐고? '술집이니 술 한잔 먹고 가라'는 식으로 해석하면 수가 낮아. 숨은 뜻이 있다 아이가. 한번 태어나 사는 인생 가볍게 살지 마라, 뭔가 일을 할라카마 딱 부러지게 하라는 기지. 독립운동도 그리 했을끼구마."

이행자 주모는 40년 전의 일을 어젯일처럼 떠올리며 '먼구름'을 그린다. 먼구름이 아낀 서예 작품을 갖고 있다는 데 대한 자부심도 내비친다. 서예 액자 옆에는 한형석의 창작 오페라인 '아리랑' 스틸사진과 한형석 연구의 권위자인 중국 베이징 중앙음악원 량마오춘(梁茂春) 교수의 부산방문 기념 친필 사인(2004. 10. 19)이 붙어 있다.

량 교수의 친필 사인은 한형석과 '부산포'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량 교수는 1997년, '한유한이여! 어디에 계시나이까'란 제목의 잡지 기고문을 통해 한형석의 중국 활동과 음악적 업적을 규명한 중국의 저명한 음악사학자다. 량 교수가 발표한 글을 계기로 '한유한 찾기'가 시작됐고, 한유한이 곧 한형석이란 사실이 확인됐다. 한형석의 항일 구국 예술활동이 중국에서, 그것도 중국인에 의해 주목되고 연구가 시작되었다는 건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부산포' 단골들의 얘기에 따르면, 한형석은 '그냥 갈 수 없잖아'라는 서예 글씨를 쓴 후에 1977년 바이걸스란 쌍둥이 가수가 같은 노래 제목으로 히트하자 이 노래를 자신의 18번으로 삼아 자주 불렀다고 한다. '부산포'가 있기 전엔 '골목집' '그냥갈 수 없잖아' 같은 간판이 붙기도 했는데, 모두 이 노래와 연관이 있다. 화가 사석원은 2005년 전국의 유명 대폿집을 순회하고 '아잖없 수 갈 냥그'(푸른숲)라는 기행문집을 냈는데, 책 제목과 표지그림은 바로 '부산포'를 표현한 것이다.

이용득(61) 부산세관박물관장과 한형석의 큰아들 한종수(56) 씨는 지난 연말 '부산포'를 찾아 한형석의 자취를 더듬었다. 이 관장은 "먼구름 선생은 총과 칼 대신 예술을 무기로 일제와 싸운 분이며, 그의 예술구국혼은 동아시아 평화의 씨앗이 되고 있다"면서 "한형석 콘텐츠를 잘 살려내면 부산의 브랜드가 될 수 있음은 물론 중국 관광객 유치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행자 주모는 "먼구름 그 할배는 참으로 무던하고 속이 깊었던 양반"이라고 했고, 한종수 씨는 "무심의 경지를 노닐듯 늘상 허허 웃곤 하시던 아버님의 모습이 떠오른다"고 했다.

후원: 부산광역시 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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