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께의 영선고개 주변 모습. 한 촌로가 지금의 영주시장 쪽에서 영선고개로 오르고 있다.

- 범죄자 효수 처형장 되기도
- 개항후 주변에 외국인 관사
- 일제강점기 때 산 깎아 매립
- 고개 사라지고 이주민 정착

우리 민족의 한의 정서가 담긴 아리랑 노래 속에는 마음으로 넘는 고개가 있다. 인생의 분수령, 아리랑 고개 말이다. 이 노래를 부르며 동래에서 한양까지 천 리 길 영남대로를 걷다 보면 삶의 역경을 참아가며 넘어야 하는 현실적인 고개에 부닥치게 된다. 조선 팔도 고갯길의 대명사 문경새재다. 이러한 관문을 통해 사람과 물자가 오가면서 쌓이고 쌓인 애환의 숨결이 고갯길의 오랜 역사가 되고 문화가 되었다. 그렇다면 변방과 관문의 역사가 점철된 우리 부산에도 어디 이와 견줄 만한 고개가 없을까. 아리랑 고개 같은 한 맺힘도 없고, 문경새재만큼 높지도 않지만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부산항과 얽힌 길 위의 역사를 말하는 데 빠질 수 없는 고개가 있다. 부산 원도심의 이야기꽃을 안고 있는 영선고개다.

지금 영선고개는 없다. 그렇지만 이 고개를 향해 오르내리던 고갯길은 남아 그 옛날의 정취를 떠올리게 한다. 본래 영선산은 현재 중부경찰서와 건너편 중부소방서 일대에 자리했던 해발 약 40m의 두 개 봉우리를 가진 산이었다. 그래서 쌍산, 양산(兩山), 쌍악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 산을 따로 부를 때는 지금의 동광동 쪽 봉우리는 영선산, 영주동 쪽 봉우리는 영사관산이라 불렀다. 일본인이 만든 1903년도의 '부산항 시가와 부근 지도'를 보면 영선산을 해관산(海關山), 영사관산을 영국영사관 부지로 표기해 놓았다.

이러한 영선산을 지나 본격적으로 길을 튼 때는 1670년대 이후가 된다. 일본인들의 요구로 두모진왜관을 지금의 용두산 쪽으로 옮기고 초량왜관을 신축하면서부터다. 왜관건물을 새로 짓거나 보수하려면 목재와 사람 등이 오가야 했는데 그 주 통로가 영선고갯길이었다. 그리고 일부 목재는 바로 영선산에서 채취하여 공급하기도 했다. 그래서 산 이름도 집을 새로 짓거나 수리한다는 뜻으로 영선산(營繕山)이 되었다. 1678년 4월에 초량왜관이 완공되고 나서 이 길은 우리나라와 일본 간에 무역과 외교, 나아가 문화교류를 터는 실질적인 통로의 역할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일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영선고개에서 초량 쪽에 있었던 설문(設門) 사이에는 초량왜관과 관련된 부속공관이 많았다. 초량객사를 비롯하여 성신당, 빈일헌, 유원관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끔 동래부사도 이 길을 따라 행차하고, 동래부의 많은 관리도 이 길을 오갔다. 그뿐이 아니었다. 초량왜관의 개시대청에서 이루어지는 중계무역을 위해서 동래상인이 드나들고 일본에서 건너온 은을 비롯한 남방의 물품이 이 고개를 넘어 영남대로를 따라 한양으로 올라갔다.

그렇지만 때로는 험난하고 무서운 고갯길이기도 했다. 개항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혼자 걷기가 무서울 정도로 소나무 숲이 울창했다. 여기에 초량왜관에서 밀수나 교간사건과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면 범죄자를 효수형에 처했던 곳이 바로 이 산의 깊숙한 중턱이었다.

개항되면서 이 길은 외국물품과 외래문화가 들어오는 통로가 되었다. 영선산 주변에는 외국인 주거지가 형성되어 해관장의 관사가 먼저 들어서고 이어서 베어드와 같은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이 땅에 기독교가 자리를 잡았다. 더욱 흥미 있는 것은 영국인 헌트 부산해관장의 외동딸이 관사에서 일하는 정원사 권순도와 눈이 맞아 사랑을 나누고, 만병 통치약으로 유명한 의료선교사 어울빈과 자기 병원의 간호사 양유식 사이의 사랑이 세간의 화제가 된 곳이 바로 영선산을 낀 산자락이었다. 이처럼 개항의 물결을 타고 이곳은 국경을 초월한 사랑으로 뜨겁게 달궈진 공간이었지만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는 상황이 바뀌었다. 일본이 세력을 동래 쪽으로 확장하려면 반드시 제거해야 할 상징적 장애물 1호가 영선산이었다. 이 산을 깎아 바다를 매립하는 부산착평공사가 시작되면서 영선산은 사라지고 대신에 새마당이란 광활한 대지가 생겨났다. 이곳에 해륙 간을 연결하는 철로가 놓이면서 일제는 만주벌까지 세력을 확장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는 귀국동포와 피란민이 대거 이곳으로 몰려들어 민족의 애환이 서린 주거지로서 주목받게 되었다.

오늘날 영선고갯길은 영주동 영주시장에서 대청동으로 연결되는 약 1.14㎞에 이르는 길이다. 지금은 그다지 많은 차량이나 사람이 다니지 않는 도심의 뒷길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영선고갯길을 따라 곳곳에 부산의 역사가 숨을 쉬는 이야기의 공간임은 틀림없다.

부산세관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