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1호선 종점될 다대포역 앞
- 낙동강 하류·산·바다가 만나 이룬
- 너른 백사장과 몰운대 아름다움 뒤로
- 왜구에 맞섰던 군사 요충지 방증하듯
- 이순신 휘하 정운 장군 순의비부터
- 을사사화에 휘말려 멸문지화 당한
- 다대첨사 윤흥신 추모비·순란사민비…
- 곳곳에 임진왜란의 상처 아로새겨있어
어느 시인이 말했다. 다대포에는 2월과 해질녘에는 가지 말라고. 이곳에서 겨울을 나던 철새들은 날씨가 풀리는 2월이면 떠난다. 떠나는 새들의 뒷모습을 본다면 왠지 서러워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해질녘이면 일몰의 장관은 사라지는 것들의 애잔함을 또 한 번 가슴속에 풀어놓는다. 그러니 다대포는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해 못 견디게 아리게 만드는 공간이란 것이다. 그렇다. 다대포는 그리움을 부추기는 장소이며 서러운 역사의 아픔마저 내장하고 있다. 자, 그럼 슬슬 다대포 역사여행을 떠나볼까.
# 낙동강 하구 모래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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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대포의 아름다운 해안. 왜적의 침입이 잦았던 이곳은 사실상 최전선이었다. |
다행스럽게 2017년 다대포까지 연장 운행하게 되면서 발품을 팔 필요가 없다. 다대포역까지 고고씽! 다대포역에 내리면 눈이 커지고 마음이 화악 넓어진다. 펼쳐진 백사장 때문이다. 이곳이 바로 다대포 해수욕장이다. 낙동강 하류와 바다가 만나는 곳으로 강이 쥐고 온 모래를 놓아버리는 곳. 주변을 둘러보면 해마다 모래가 쌓여 모래섬이 생겨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광안리와 해운대 해수욕장이 모래가 사라져서 걱정이라면 이곳은 계속 누적되는 모래톱에 점점 커져서 걱정이라고 할까.
이런 아름다운 백사장이 통째 사라질 뻔한 일이 있었다. 1991년, 정부에서 이곳에 목재용 전용부두 건설을 위해 매립계획을 세웠던 것. 이에 주민들은 격렬히 반대운동을 전개해 그 계획을 무산시켰다. 그러나 2000년에 또 다시 매립계획을 발표하자 주민과 시민단체가 연합해 다양한 반대운동을 펼쳐 끝내는 계획을 무산시키기에 이르렀다. 만약 그때 주민들의 반대가 없었다면 지금의 해수욕장은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니 '바다음악분수대' 옆의 '다대포매립백지화기념비'를 그냥 지나치지 말 것을 당부한다.
#구름에 잠겨 있는 곳
다대포 해수욕장을 끼고 새로 조성한 해변공원으로 직진하다 보면 눈앞에 바투 산 하나가 보인다. 몰운대(沒雲臺)다. 한자 그대로 구름에 잠겨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몰운대는 원래 섬이었지만 모래톱이 쌓이면서 육지와 붙어 지금의 모양이 되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걷는 발밑에는 수많은 세월 동안 이곳에 쌓인 모래더미란 것을 알아두자. 이곳에는 현재 군부대와 옮겨온 다대포객사, 정운장군순의비가 있다. 그곳을 전부 둘러보려면 제법 여유로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밖에서 보는 것보다 규모가 엄청 크니까. 필자의 걸음으로도 두 시간 정도? 우와, 그렇게 많이 걸려? 하고 지레 겁낼 필요는 없다. 미인송처럼 하늘로 쭉쭉 뻗어올라간 해송숲을 걷다가 보면 원시림의 장관에 입이 쫘악 벌어질 테니까.
진입로를 따라 조금만 들어오면 외로운 여인처럼 고풍스런 건물 하나가 보일 것이다. 그곳이 바로 다대포초등학교 운동장 옆에서 옮겨온 다대포 객사다. 다대포 객사는 외부인이 방문했을 때 사용하던 시설로 원래 다대포성 안에 있던 건물이다.
다대포 객사를 지나면 길이 다시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쪽으로 가면 정운장군 순의비가 서 있다. 정운 장군은 사후 내려진 직함이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녹도만호였다. 그는 이순신이 이끄는 유능한 장수 중의 한 사람으로 다대포와 부산포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을 무찌르기 위해 가덕도에서 이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수많은 전투로 부상 중이던 정운을 이순신 장군이 만류하지만 고집을 부려 전투에 참여했다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기어이 목숨을 잃는다. 일설에는 정운 장군이 전투를 앞두고 이곳을 지나갈 때 몰운대라는 지명을 듣고 자신의 이름도 '구름 운'인데 같은 걸 보니 여기가 내 죽을 곳이군, 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라면 이순신 장군만 떠올리지만 그의 수하에 정운과 같은 훌륭한 군인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드라마같은 윤흥신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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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흥신 장군을 기리는 부산 다대포의 윤공단. |
이번에 갈 곳은 다대포 성터과 윤공단이다. 다대포성은 애석하게도 이곳이 개발되면서 훼손되어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그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므로 걱정하지 마시라. 일단 부산유아교육원으로 가자. 부산유아교육원은 원래 다대포초등학교가 있던 곳으로 조선시대에 다대포성 안이었다. 지금도 운동장에는 객사 터와 '첨사윤흥신 순절비' 표지석이 남아 있다. 그러니 그것을 둘러보고 성벽을 찾아가도 좋겠다. 부산유아교육원 오른쪽 급식시설 뒤편, 정확히 말해 원불교 다대교당과 카센터 사이의 골목길에 성벽이 있다. 이 건물의 아랫부분이 바로 성벽이다. 그러니까 이곳 구평동 일대는 바로 다대포성이 있던 곳이란 얘기다. 다대포성은 조선시대만 해도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리하여 다른 곳보다 직급이 높은 관리와 군사가 주둔했다. 임란 시 이곳을 지키던 윤흥신 첨사. 그는 이곳을 이틀간 지키다가 장렬히 전사한다. 그분의 넋을 기리고 제를 지내는 곳이 길 맞은편의 윤공단이다.
자, 그럼 윤공단으로 향하기 전에 윤흥신이란 인물에 대해 잠깐 알아보기로 하자. 그의 생이야말로 한마디로 파란만장한 삶의 주인공이니까. 지금으로 치자면 마치 소설이나 드라마 속의 주인공으로 스카웃될 정도? 윤흥신은 파평윤씨로 조선시대 명문 집안이었다. 하지만 을사사화 때 그의 집안은 멸문의 화를 입는다. 그렇다면 그의 집은 왜 을사년에 화를 입게 되었는가. 이를 알기 위해선 조선시대의 역사를 조금 알 필요가 있다. 우리가 학교에서 외운 조선시대 왕인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중인명선'을 떠올리면 더 이해가 빠르다.
조선 개국공신이었던 파평윤씨 가문은 대대로 부와 권력을 누린다. 그러다가 윤흥신의 아버지 윤인이 연산군의 폭정을 견디다 못해 연산군을 왕좌에서 쫓아내기 위한 쿠데타에 가담한다. 이것이 이른바 중종반정이다. 그리하여 자의가 아니라 신하들에 의해 타의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신하들에게 큰소리 한번 칠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만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7일 만에 정비였던 '단경왕후 신씨'를 폐출시킨 일이다. 연산군의 측근의 딸이라는 이유로 7일 만에 신하들의 강요에 떠나보낸 후 중종은 마지못해 장경왕후를 왕비로 삼는다. 이 장경왕후가 바로 윤흥신의 고모다. 그러니 왕의 외척이 된 윤흥신의 가문은 막강한 권력의 중심이 서게 된 것이다. 문제는 고모 장경왕후가 아들을 낳고 산후통으로 고생하다가 그만 죽어버린다는 것이다. 중종이 다시 부인을 맞이하는데 그이가 바로 문정왕후다. 문정왕후는 야심이 큰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아들을 낳았으니 장경왕후가 나은 아들이 밉지 않을 수 없었다. 장경왕후의 아들만 없으면 자신의 아들이 왕이 될 수 있었으니까. 중종의 뒤를 이어 장경왕후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으니 얼마나 마음이 언짢았을까. 한데 심약한 장경왕후의 아들 인종은 왕위에 오른 지 9개월 만에 덜컥 목숨을 잃고 만다. 이에 대해 탐욕이 강한 문정왕후의 음모설을 제기하기도 하나 일단 그건 접어두자. 인종이 죽고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이가 바로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이었다. 명종은 당시 12세로 어머니의 수렴첨정이 필요한 어린 왕이었다. 그러니 권력을 한손에 거머 이가 왕의 어머니 문정왕후였다. 그녀의 입장에선 같은 파평윤씨이면서도 인종의 외척인 윤흥신의 부친과 추종세력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하여 눈엣가시였던 윤흥신의 부친을 역모죄로 모함, 일거에 일가족을 처형해버린다. 이것이 바로 윤흥신의 가문이 멸문지화를 입은 을사사화인 것이다.
# 동생과 함께 끝까지 저항
자, 그럼 여기서 왜 윤흥신은 어떻게 살아남았느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건 윤흥신이 너무 나이가 어려서였다. 그때 겨우 여섯 살이었으니까. 그로 인해 세 형과 달리 윤흥신과 그의 남동생 윤흥제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역적의 자식이란 죄로 노비로 전락해 32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관노로 살아야 하는 운명이었다. 그런 윤흥신이 천우신조로 노비의 굴레를 벗게 되었다. 명종의 뒤를 이어 선조가 즉위하자 부친 윤임이 신원복권되면서 윤흥신도 양반 신분을 되찾은 것이다. 양반 신분을 찾은 이듬해, 윤흥신은 부친의 무과 경력과 공신의 후손이라는 점을 인정받아 무과별시에 응시, 출사하는 순탄한 길을 걷는 듯했다. 하지만 충북 진천현감이 되었으나 임기를 1년도 채 못 채우고 '문자를 읽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만 자리에서 쫓겨난다. 그런 차에 왜구로 인해 남해가 다시 어지러워질 것을 우려한 선조가 당시 우의정 류성룡의 천거에 받아 다시 다대첨사로 임명하게 되면서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선조가 우려했던 전쟁이 곧 현실이 되고 말았다. 1592년 4월 13일 오후 왜군은 윤흥신과 군사 800명이 지키는 다대진을 공격해왔다. 윤흥신은 동생 윤흥제와 함께 첫날 조선군의 동태를 살피던 왜 100명을 물리쳤으나, 다음 날 왜군 1200명의 공격에 맞서 싸우다 순절한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윤흥신은 동생과 함께 끝까지 저항하다가 손을 잡고 못으로 뛰어들어 자결했는데 훗날 사람들이 시체를 건져내 떼어내려 해도 두 사람의 팔이 엉겨 떨어지지 않아 할 수 없이 팔을 자른 후에야 묻을 수 있었다고도 한다.
#다대포 처녀 윤백련
윤공단에는 세 개의 비가 서 있다. 첨사순절비의 오른쪽에 서 있는 비가 바로 동생 '의사윤흥제비'이고 왼쪽에 있는 것이 순란사민비(殉亂士民碑)이다. 순란사민비는 전투 당시 이름 없이 스러진 수많은 백성을 위해 세운 비석이다. 이중 두 사람의 이름이 이충무공전서에 의해 밝혀진다. 그들이 바로 비운의 여인 윤백련의 아버지인 윤곤절(尹昆節)과 어머니 모론(毛論)이다. 그렇다면 윤백련은 누구인가. 이곳 전투에서 부모를 잃고 살아남았지만 한 많은 생을 마감한 여인이다.
다대포문화연구회 한건 회장이 찾아낸 사료에 의하면 사연이 이렇다. 부산성과 다대성을 차례로 점령한 왜군은 김해를 거쳐 거제도 옥포로 건너가 노략질을 자행한다. 이 사실을 안 이순신 장군의 연합함대는 기습작전으로 옥포 해안에 들이닥쳐 선창에 정박해 있던 왜선 26척을 개박살낸다. 이 전투를 우리는 옥포해전이라 부른다. 당시 왜선의 배 안에서 일본 옷을 걸치고 머리를 단발하여 일본여자같이 보이는 처녀 하나를 발견한다. 그녀가 바로 14살의 다대포 처녀 윤백련이다. 그녀는 부모를 잃고 동래에 있는 할아버지 집을 향하다가 왜군에게 잡혀 왜군에게 매일같이 몹쓸 짓을 당하고, 성적 노리개 신세로 선창에 잡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연을 안 이순신 장군은 순천이나 보성으로 보내어 보살피다가 온전하면 고향으로 돌려보내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백련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어 끝내 보성 땅에서 홀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사람들은 착각한다. 부산은 후방이라 안전한 곳이라고. 하지만 적을 북한이나 중국이 아니라 일본으로 가정해보자. 그럼 전쟁의 최전방은 어느 곳인가. 바로 이곳이 아닌가.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간다. 산 사람의 목숨뿐만 아니라 윤백련처럼 살아남은 자의 운명까지 비참하게 바꾸어버린다. 우리는 이 사실을 다대포에서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 다대포는 서글픈 역사가 숨어 있는 또 하나의 슬픔의 장소인 것이다.
이상섭 소설가
※ 공동기획: 동서대학교,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