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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당포는 부산 첫 이양선인 프로비던스호가 닻을 내린 곳이다. 사진은 1952년 용당포 전경.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
- 홋카이도 근해서 태풍 피해
- 1853년 부산 앞바다로 피항
- 조정관리와 의사소통 안돼
- 아메리카를 '며리계'라 불러
19세기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흐름 속에 우리나라에는 이양선의 시대라고 부를 만큼 다양한 국적의 서양 선박이 자주 나타나곤 했다. 이양선에 대한 최초의 세부적인 조선 기록은 정조 21년(1797) 10월 부산 용당포에 나타난 영국 군함 프로비던스(Providence)호에 대한 것이다. 그로부터 거의 반백 년이 지난 1853년 초에 미국의 포경선 한 척이 바로 그 자리에 닻을 내렸지만, 조선이 이들 이양선을 대하는 모습은 그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이 포경선은 일본 홋카이도 근해에서 고래잡이를 하다가 폭풍을 만나 용당포 앞바다까지 휩쓸려서 온 것이었다. 그 당시 미국은 세계 최대의 고래잡이 국가였다. 19세기 후반 석유가 대량생산되기까지 고래는 바다를 떠다니는 자원의 보고(寶庫)로서 고래 한 마리를 잡으면 등유는 물론이고 윤활유에다 화장품과 의약품 원료 등을 조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본을 개항시킨 페리 제독은 이러한 고래를 쫓아 포경선과 함께 극동지역까지 오게 되었고, 미국의 입장에서는 포경 어업전진기지와 중국 무역을 위한 교두보가 절실했다. 이것이 일본을 무력으로 개항시킨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일성록(日省錄)에 의하면 용당포에 포경선이 입항한 일시는 1853년 1월 29일 정오쯤이다. 이번에도 조정에서는 예전에 영국 함선이 왔던 것처럼 통역관 중심으로 훈도, 별차, 소통사를 현장으로 보내 문정(問情), 즉 배에 올라 심문을 하였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이 일본어 전문통역관이어서 그런지 미국 선원들과는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미국 선원들도 답답했는지 문정관을 보면서 자신과 선박을 가리키며 "며리계(里界)" "며리계" 하는 말만 되풀이하였다(※는 한자음으로 '이'이나 이두용법에서는 '며'로 읽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소통이 어렵게 되자 마지막으로 필담하려고 선원에게 붓을 건넸다. 우리가 수년에 걸쳐 연습해도 힘겨운 것이 붓글씨인데 하물며 외국 선원이 낯선 붓을 들고 영문을 적는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더군다나 알파벳에 대해 생면부지인 조선 문정관이 화선지에 써 놓은 이들의 글씨체를 보고 더욱 혼란을 일으켰음은 분명하다. 그래서 '구름 같기도 하고, 그림 같기도 하며, 전서체도 아니고 언문도 아니어서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결국, 조선 문정관들은 대화로 조사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이번에는 직접 배 안을 살펴보기로 했다. 배는 아주 사치스러웠으며 선원들의 모습은 모두가 괴상하게 생겼다고 했다. 코가 높고, 수염은 없으며, 눈은 노랗거나 파란색이었는데 고슴도치처럼 산발한 머리에 검은 가죽 모자를 썼고, 어떤 사람은 문신까지 있었다고 했다. 포경선에는 43명이 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우리와 너무나 닮은 두 사람이 끼어 있었다. 그들은 일본인으로, 약 8개월 전에 한마을에 사는 네 사람이 배로 땔나무장삿길을 나섰다가 조난했다고 한다. 다행히 지나는 미국 포경선에 구조되어 이 두 사람은 지금의 포경선으로 옮겨 타게 되었다고 했다. 이들은 용당포에서 하선하여 초량왜관을 거쳐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처럼 10여 일 동안 용당포에 머물면서 조선 사람들에게 한동안 '며리계'라는 깊은 인상을 심어준 이 포경선은 훗날 알려지기로는 616t급의 사우스 아메리카(South America)호였다. 그리고 이 배의 선원들이 말한 '며리계'는'America'라는 말이었다. 당시 조선 관리들은 'A'가 약하게 발음되니까 잘 듣지 못하고, 뒤에 연이어 나오는 'merica'의 'me'에 강세가 있어 '며리계'로 들렸던 것이다. 중국 사람들도 우리와 비슷하게 들렸던지 미국을 '미리견(美利堅, 彌利堅)'이라 표기하고, 일본은 '메리켄(米利堅)'이라고 읽기도 한다. 이처럼 용당포 앞 해상은 기록상으로 보면 우리나라 사람이 영국인을 비롯해 미국인과도 최초의 만남이 이루어진 역사적인 공간이자 대외정보의 통로였지만 해금(海禁)으로 더는 진전이 없었다.
부산세관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