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대 촬영한 헌트 해관장(원내)과 부산해관 직원.

- 청나라서 건너와 해관장 맡아
- 용미산 주변 바다 첫 매립공사
- 보세창고·해관 부속건물 지어

- 日 복병산 전체 매입 시도
- 조정에 조언 통해 막기도

부산해관의 제3대 해관장 헌트(Johnathon H. Hunt)는 1888년 7월부터 1898년 2월까지 자그마치 10년 가까이 한자리를 8지키면서 부산항의 터줏대감이 되었다. 낯설고 덜 문명화한 환경에서 오래 생활하려면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을 테지만 헌트 해관장은 남달랐다. 그는 청나라에서 해관원으로 근무할 때부터 이익세라는 조선 사람을 곁에 두고 조선말을 배웠고 부산에 와서도 가정교사를 두고 못다 한 어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이렇게 해서 갖춘 우리말 실력은 현지인과의 거리를 더욱 좁히면서 부산을 찾아오는 외국인을 안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말로 하문덕(何文德)이라 불린 헌트 해관장은 1854년 6월 영국 말버러에서 태어났다.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는 개항한 항구의 해관 업무에 유럽인들을 대대적으로 초빙했고 헌트도 그 일원으로 청나라에 건너오게 되었다. 그러다가 1885년 10월 3일 미국인 메릴(Henry F. Merill)이 묄렌도르프에 이어 제2대 조선해관총세무사(지금의 관세청장)로 임명되자 그를 따라 우리나라에 왔다. 1882년에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우리나라는 다음 해에 해관을 설치하면서 청나라 해관에서 근무하던 유럽인들을 초빙하여 우리의 해관 업무를 맡겼다. 곧 메릴의 비서실장이 된 헌트는 얼마 후에 조선해관의 실태를 알게 되었고, 앞으로 그는 메릴처럼 조선해관의 총세무사가 되어서 나름대로 원대한 꿈을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펼치고 싶었다.

이처럼 처음부터 조선에 애착을 가지고 있던 헌트는 2년여의 비서실장을 마치고 부산해관장으로 발령받아 임지에 내려왔다. 그러나 개항한 지 10여 년이 지난 부산항에 와서 보니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항만시설의 부족이었다. 특히, 미비한 하역시설과 부족한 화물장치 공간은 개항장을 운영하는 데 큰 애로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먼저 용미산 기슭(현 부산데파트 부근)을 깎아 주변 바다를 메우는 해관 부지 조성사업을 펼치려고 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외국인이 우리의 국토를 자기 마음대로 형질을 변경해 가면서 매립하는 데는 비협조적이었다. 그러나 헌트 해관장은 이에 물러서지 않고 조정을 이해시키고 설득해 매립허가와 함께 1000냥(兩)의 공사비를 받아내어 다음 해인 1889년에 준공을 보았다. 이게 부산항 최초의 매립공사였다. 이어서 공사비 2546냥을 받아 이곳에 보세창고와 해관 부속건물도 지었다.

이러한 일들을 계기로 조정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던 헌트 해관장은 일본이 막대한 자금으로 해관장 관사가 있는 복병산 전체를 사들이려고 하는 것을 알고 이를 조정에 조언하여 그들의 수중에 넘어가는 것을 사전에 막기도 했다. 부산해관장이란 직책으로 조선관문의 수장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지역민의 의견을 수렴하고, 조선의 이익이 어떤 것인지를 대변할 수 있어야만 했다. 그렇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던가. 근무하면서 영국 국경일에는 휴무할 정도로 그의 가슴 속에는 항상 조국 영국이 숨 쉬고 있었다. 1894년 영국의 여류여행가 비숍이 부산항을 찾아 무역 실태를 살펴보면서 조선의 대표적 개항장에 헌트 해관장과 같은 성실한 사람이 지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국의 통상을 위해서는 호의적이며 중요하다는 것을 높이 평할 정도였다.

더구나 1897년 상반기에는 부산 주재 영국 부영사라는 직책까지 그에게 주어지면서 더욱 발걸음이 바빠졌다. 때마침 그해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주년을 맞아 6월 20, 21일 양일에 걸쳐 기념 축하행사가 개최되었는데 첫째 날은 관사에서 부산지역의 유지와 외국인을 초대한 가운데 가든파티가 열렸고, 둘째 날은 외국인만 참가한 요트대회를 개최했다. 특히 가든파티에서 선 보인 해관장 부인의 피아노 연주 솜씨는 땅거미가 내려앉은 복병산 자락을 아름다운 선율에 잠기게 했다고 한다.

이렇게 부산에서 분주한 나날을 보내면서 총세무사가 되겠다는 야망을 저버리지 않았던 헌트 해관장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하나 터지고 말았다. 그의 외동딸이 관사에서 정원사로 일하던 조선 청년과 눈이 맞아 임신했던 것이다. 애지중지 키운 외동딸의 뜻하지 않은 일에 큰 충격을 받은 헌트는 곧 사표를 내고는 1898년 2월 19일, 울먹이는 아내와 외동딸을 데리고 상하이로 가는 증기선에 몸을 싣고 정든 부산항을 떠났다.

부산세관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