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싱가포르 클락키 MRT 전철역 인근에 설치된 ERP 징수대. 이곳을 지나가는 차량은 자동으로 통행료가 빠져나간다. 김준용 기자 |
- 4만 싱가포르 달러 차 사려면
- 7만2000달러 추가등록비 부담
- 자연스럽게 차량 구입 줄어들어
- 모든 운행 차량에 단말기 부착
- 혼잡통행료 자동으로 빠져나가
- 속도 줄일 필요 없어 체증 해소
영토가 좁은 국가일수록 교통 문제는 심각하다. 정해진 자원(영토)이 적으니, 차량이 늘어난다고 무작정 도로를 늘릴 수는 없다. 이 때문에 각국에서는 차량등록을 억제하려는 방안 마련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싱가포르(면적 710㎢)는 지구에서 가장 강력한 차량 등록 억제 정책을 펼치는 나라다. 싱가포르의 대표적인 차량등록 억제 정책은 차량취득권리증(COE·Certification of Entitlement)과 혼잡통행료(ERP·Electronic Road Pricing)다.
COE와 ERP 등의 차량등록 억제 정책에 힘입어 지난해 12월 기준 등록 차량은 97만2000여 대다. 2013년 싱가포르의 차량 등록 대수는 97만4000여 대로, 1년 새 2000여 대의 차량이 줄었다.
하지만 싱가포르와 면적이 비슷한 부산(766.12㎢)의 등록 차량은 어느새 100만 대를 바라보는 상황이다. 부산시 자료에 따르면 지난 8월 기준 등록된 승용차가 98만9366대에 달한다. 싱가포르의 인구(547만여 명)가 부산시 인구(341만여 명)보다 많고, 싱가포르 차량등록 대수는 버스·택시까지 포함한 수치라는 점에서 급증하는 부산의 차량 등록 대수를 제어할 강력한 방안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COE(차량취득권리증)
COE는 싱가포르 정부가 펼치는 가장 효과적인 차량등록 제어 정책이다. 싱가포르에 등록된 차량은 차종을 가리지 않고, COE를 구입해야 한다. 10년 동안 유지되는 COE는 통상적으로 수입비용, 세금, 등록비용 등을 포함한다. 차를 사려는 사람은 차량 가격에 COE를 얹어서 사야 한다.
COE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일반적인 등록비용을 제외한 '추가등록비용'(ARF·Additional Registration Fee)이 포함된다는 점이다. ARF는 최소 차량 가격과 동일한 가격, 혹은 그 이상으로 책정된다. 만약 차량 가격이 2만 싱가포르달러(SGD) 이하라면 차 가격과 같은 액수의 ARF가 부과된다. 만약 차량의 가격이 3만 SGD 이상이라면 140%, 4만 SGD 이상이라면 180%의 ARF가 부과된다. 2만 SGD에 달하는 차를 구입해 등록하려면 총 4만 SGD의 비용이 드는 셈이다.
싱가포르 경영대학 박병준(과학기술학부·47) 교수는 "COE는 경제적으로 차량 구입을 억제하므로 현재 싱가포르의 교통정책 중 가장 영향력이 세다"며 "COE 가격이 크게 내렸던 2008년께 싱가포르에 차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시내 곳곳에서 교통체증이 발생했다. 2011년을 기점으로 다시 COE가격이 올라가자 전체적인 교통 환경이 나아졌다"고 설명했다.
■ERP(혼잡통행료)
ERP는 1998년부터 싱가포르 국토교통부가 시행하는 정책이다. 이는 1975년 도입된 지역허가제도의 맥을 잇는 제도다. ERP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도입된 전자동 혼잡통행료 정책이다. 구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오전 7시30분~9시30분과 오후 5시30분~8시 사이에 운영한다. 시간과 차량 종류에 따라 1SGD에서 6SGD까지 통행 요금이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나홀로 차량을 상대로 받는 혼잡통행료와 다른 부분은 요금을 내기 위해 차가 멈출 필요가 없고, 속도를 줄일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싱가포르를 통행하는 모든 차량은 내부에 ERP단말기를 장착해야 한다. 운전자가 미리 충전해놓은 금액이 ERP 신호 지지대(징수 포인트)를 지날 때마다 자동으로 차감되는 형식이다. 차량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싱가포르 정부는 최근 ERP가 자리 잡은 이후 출퇴근 시간대 2만5000대의 차량이 줄고, 도로 위 평균 통행속도가 20% 증가했으며, '카풀'이 증가했다는 통계자료를 발표했다. 싱가포르에 ERP가 성공적으로 정착한 후, 영국 런던과 스웨덴 스톡홀롬 등 선진국에서도 각각 2003년과 2007년 ERP시스템을 도입했다.
싱가포르 국립대 리더홍(도시환경공학과·48) 교수는 "한국은 고속도로에 주로 요금정산소를 설치했지만, 싱가포르는 도심지 한가운데 도로를 통제하기 때문에 운전자들의 통행 습관 자체를 고쳐나갈 수 있는 정책"고 말했다.
# "자동차산업·사회구조, 싱가포르와 많이 달라 도입하기 쉽지 않을 것"
■ 한국에 적용 가능성은?
싱가포르의 교통정책은 국가 경제가 자동차 산업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아 가능하다는 분석이 있다. 싱가포르는 제조업 중심 국가가 아니라, 금융이 주된 수입원이어서 자동차 등록 대수 제한 등에 쉽게 나설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싱가포르에서 교통 관련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는 로널드 리(33) 씨는 "혼잡통행료(ERP)나 차량취득권리증(COE)은 좋은 정책이긴 하지만, 한국에서는 자동차 회사 등을 위시한 재벌의 로비력에 밀려 쉽게 도입하기 힘들 것"이라며 "사실 싱가포르의 교통 시스템은 국민들을 조금이라도 더 일할 수 있게 만드는 구조다"고 비판했다.
싱가포르 전철(MRT)은 오전 출근 시간 전에는 사람이 몰리는 일부 역까지 무료로 운영한다. 편리해 보이지만, 사실상 국민 행위를 구속하는 역할을 한다. 무료 전철을 타려면 더 일찍 일어나야 하므로 하루 근무 시간이 더 늘어난다. 로널드 리 씨는 이를 두고 "싱가포르 교통 시스템은 일종의 행동경제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며 "강력한 권력 집중 현상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고 말했다.
COE와 ERP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COE와 ERP는 각자 따로 보면 합리적인 정책으로 보이지만, 두 정책이 묶이면서 그 의미가 변질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운전자들이 비싼 돈을 주고 COE를 구입했는데, 고작 2~5SGD에 불과한 ERP비용 때문에 차를 타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SIM대학 박병준 교수는 "중형차를 사려면 1억 원이 넘게 들어가는데, 과연 2~5SGD(1650~4125원)가 차량 운행을 억제하는 힘이 있겠나"며 "COE의 경우에는 정부의 정책에 따라 가격 폭이 너무 크게 요동치는 경우도 있어 앞으로 계속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실제, 운전자들의 반응은 더욱 비판적이었다. 싱가포르에서 만난 여러 명의 택시 운전사들은 "ERP는 '매일 돈을 뺏는다'(Everyday Robbing Prices)의 줄임말이라고 생각한다"며 "도로가 여유로워진 부분은 있지만, 영업차 등에 대해서는 혜택도 필요하다고 본다"고 입을 모았다.
# "운행거리 기준 혼잡통행료 부과 시스템 개발 중…교통문화 또 한번 진화 할 것"
■ 싱가포르 국립대 리더홍 교수
싱가포르의 혼잡통행료(ERP)는 현재 대변혁을 앞두고 있다. 2020년을 목표로 싱가포르는 현 ERP 시스템의 단점을 보완한 새로운 'ERP-2' 준비에 한창이다. ERP는 앞으로 어떤 변혁을 맞게 될까.
싱가포르국립대 리더홍(도시환경공학과·48·사진) 교수는 현재 운영하는 ERP 시스템의 가장 큰 단점은 불공정에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현재의 ERP 시스템은 치명적인 단점을 갖고 있습니다. 두 대의 차량이 ERP 신호 지지대를 동시에 들어간 이후, 1대는 내부에 주차하고, 다른 1대는 도심 내부를 마음껏 돌아다닌다고 해봅시다. 현재는 두 차량이 똑같은 비용을 지불합니다. 운행차량과 주차차량이 같은 금액을 낸다는 것은 불합리하죠"라고 말했다.
ERP-2는 이러한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장치다. 이 장치를 부착하면 위성으로 각 차량의 위치를 조회할 수 있어 운행한 만큼 도로 혼잡과 온실가스 배출에 대한 비용을 지급한다. 다시 말해 현재의 ERP가 신호 지지대를 중심으로 요금을 정산한다면 ERP-2는 운행거리를 기준으로 요금을 정산하는 셈이다. 하지만 ERP-2에도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국가가 개인의 위치정보를 추적하므로 '빅브러더' 논쟁이 일어날 수 있다. 이에 대해 리 교수는 "ERP가 처음 등장했을 때도 사생활 침해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실제 사생활 침해 사례는 없었다. ERP-2 시스템은 정부에서 차량과 단말기를 관리하는 주체와 이동 경로를 관리하는 주체를 따로 둘 예정이므로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만 출생인 리 교수는 싱가포르 시민단체 등에서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2~2014년 싱가포트 국토교통부의 도심교통관리 프로그램의 자문위원으로 일했다. 그는 미국 메사추세츠 공대(MIT)에서 선정한 세계를 바꿀 수 있는 아이디어를 가진 35세 미만의 혁신 인물에 선정되기도 했다.
싱가포르=김준용 기자 jykim@kookje.co.kr
※ 공동기획 : 부산시·부산경찰청·부산교통공사·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