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리'가 통했다. 막힌 가슴이 뚫린 듯 통쾌하고 후련했다. 동래현 관노 출신의 천재과학자 장영실이 중앙 정치판에 환멸을 느끼고 '동래(부산) 사람'으로 귀향하는 결말에선 가슴이 울컥, 뜨거워졌다. 신분제의 족쇄, 변방인의 설움, 홀대 받는 민중, 아웃사이더의 비애가 시공을 초월해 전율로 다가왔다. 장영실이 우리 곁에 있구나…. 이 정도면 부산을 대표하는 문화콘텐츠로 키울 수 있겠다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작·연출자인 이윤택은 시종 상기되어 있었다.
지난 25~28일 부산 동래문화회관에서 공연된 연희단거리패의 '궁리- 세종과 장영실'은 지역에서 모처럼 만난 창작뮤지컬이었다. 부산문화재단 '지역 브랜드 콘텐츠 제작 지원사업'의 첫 수혜작으로 2억 원을 지원받은 작품이라 관심도 쏠렸었다. 작품은 기대 이상이었다. 4일간 5회 공연에 1500여 명이 찾아 객석도 거의 다 채웠다.
공연 장소가 장영실이 태어나 자란 동래 관노산(官奴山) 자락이란 점에서 스토리 외적인 흥미도 유발했다. 얼마나 무시당했으면,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관노'라는 산 이름이 붙었을까. 그 덕에 평소 찾아가기조차 힘든 동래문화회관이 모처럼 관객들로 북적댔다.
이윤택의 무대 연금술은 역시 빼어났다. 그는 좁은 무대를 넓게 쓰면서 연극과 춤, 음악, 조명을 정교하게 결합시켜 장영실의 정체성과 고뇌를 부각시켰다. 장영실을 상징하는 과학 발명품들, 즉 일성정시의, 현주일구,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등을 소품으로 활용해 소개할 때는 어린 관객들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다만 뮤지컬임에도 음악적 완성도가 다소 떨어진 건 아쉬움이었다.
'뮤지컬 궁리'는 오는 11월부터 부산 기장군 장안의 '안데르센 극장'에서 상시 공연되며, 현재 '부산사람 장영실'을 찾는 캐스팅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롱런의 길을 닦고 있는 셈이다.
'궁리'는 사실 이윤택의 자존심 같은 작품이다. 2012년 4월 국립극단을 이끌고 서울과 수도권 공연을 성공시킨 이윤택은 그해 부산 공연을 추진했다. 그즈음 본지는 지역 인물 스토리텔링 차원에서 '궁리'를 연극소설로 전환, 총 25회를 연재했다. 하지만 연극 '궁리'는 스폰서 불발로 부산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그후 부산시가 시행한 '부산 뮤지컬 창작극 공모전'에서도 '궁리'는 서울의 (주)광화문연가 팀에 밀려 고배를 마셨다. 내상을 입은 이윤택은 2012년 10월 부산 거제동의 가마골소극장(현 한결아트홀)을 전격 폐쇄한다고 발표했다.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 거장의 고뇌는 깊어져갔다.
'궁리'가 뒤늦게나마 부산시 지원에 힘입어 창작 뮤지컬로 거듭난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다. 부산을 대표하는 문화콘텐츠로 육성되는 발판이 마련된 것은 물론, 부산시와 불화 아닌 불화를 겪어온 이윤택의 '부산 귀환'이란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궁리' 공연 마지막 날 이윤택은 이렇게 소회를 털어놨다. "관노 출신의 천재 장영실 스토리를 접한 순간 나는 뭉클하는,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저항의 에너지가 솟구침을 느꼈다. 이 작품은 오늘을 살아가는 소외되고 있는 지방민, 이 땅의 변방인, 아웃사이더들의 존재 증명을 위해 공연되기를 바랐고, 나는 이 작품으로 내 고향 부산에 귀환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이윤택이 쓰는 '장영실 귀향 신화'의 1막 이후가 보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