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년층 등 신분 증명 힘들어

김모(여·29) 씨는 최근 생활비 통장을 만들려고 신한은행을 찾았다가 황당한 일을 겪었다. 은행에서 김 씨에게 통장을 만들기 위해서 공과금 고지서를 보여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에 김 씨는 생활비 통장을 계 모임 통장으로 바꿔서 개설하려 했지만, 계 모임 통장은 명부와 회칙 등이 있어야 개설할 수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김 씨는 "평소에 공과금 고지서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옆에서 급여통장을 개설하려는 사람은 재직증명서 등을 요구받고 통장을 못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은행권이 신규 통장 개설 조건을 강화하면서 불편을 겪는 고객들이 늘어나고 있다. 은행이 통장 개설을 강화한 이유는 최근 몇 년 새 대포통장으로 피해를 보는 사람 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났기 때문이다.

8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보이스피싱 등으로 인한 대포통장 발생 건수는 2012년 3만3496건, 2013년 3만8437건, 지난해 4만4705건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이에 금감원은 지난해 대포통장 근절 방안을 검토하라는 지침을 금융권에 전달했다.

이후 부산 지역 은행권에서도 신규통장 개설 조건을 대폭 강화했다. 예전과 달리 지금은 금융거래 목적 확인서 등을 작성해야 한다. 은행권은 특히 단시간에 여러 개의 통장을 개설한 사람이나, 주소지가 멀리 있는 사람 등을 중점적으로 확인한다. 제대로 된 서류를 구비하지 않으면 은행 측이 통장 개설을 거절할 수 있다. 부산은행 관계자는 "대포통장은 명의 도용자도 처벌받을 수 있다"며 "불미스러운 일을 미리 방지하려는 조처"라고 말했다.

하지만 은행 측이 신규 통장 개설 조건이 까다로워진 것을 고객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아 통장 개설에 불편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다. 은행이 미리 고객들에게 이를 안내했으면 이용자가 은행에 헛걸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 은행에서는 내부 직원만을 대상으로 이 같은 사항을 교육한다. 통장을 만들러 온 고객들에게 제대로 설명하라는 취지이지만, 고객이 '두 번 걸음'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미취업자나 노년층 등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준비하기 힘든 사람 역시 통장 개설에 애를 먹고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학생들은 신분 확인이 비교적 쉽지만, 노년층은 통장 개설이 어려운 면이 있다"며 "다양한 방법으로 신분을 확인해 불편이 없도록 하겠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보이스피싱용 대포통장을 막으려다 시민에게 갑자기 큰 불편을 주는 것은 아닌지 은행이 이를 숙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