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부산 부산진구 노인복지관 앞 도로 '실버존'에 차량이 불법주정차돼 있다. 강덕철 선임기자 kangdc@kookje.co.kr

- 55개 실버존 지키는 차량 드물어
- 올들어 879개 스쿨존서 사고 8건
- 시내버스 중 저상은 16% 불과
- '두리발' 법정 기준 70대나 부족
- 차량중심 정책 사람위주 바꿔야

시각장애인 김모(45) 씨에게 외출은 모험과 같다. 음성 안내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고, 점자 블록이 없는 거리를 걸으며, 툭툭 치고 지나는 시민까지 김 씨의 외출은 아슬아슬함의 연속이다.

휠체어를 타는 박모(34) 씨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몇 대 없는 저상버스를 타려고 버스 회사에 미리 전화해 도착 시간을 확인하는 것은 기본이다. 휠체어 승객을 발견한 버스 기사가 복잡한 도로를 헤집고 겨우 정류장 위치에 맞춰 정차하고, 서툴게 리프트를 작동하는 모습을 보면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주변 승객들의 눈치는 덤이다.

■교통약자에게 거리는 지옥

거리의 일상에서 느끼는 두려움은 장애인만의 것이 아니다. 기력이 떨어진 노인에겐 도로 횡단은 힘든 일이다. 신호등의 초록 불이 켜진 동안 부지런히 걸어야 겨우 도착한다. 경사가 가파르고 난간 하나 없는 계단은 엄두도 못 낸다. 아직 배가 많이 나오지 않은 임신부는 노약자석에 앉았다가 따가운 시선에 시달려야 한다. 난폭한 운전자로 다치거나 죽는 어린이는 한둘이 아니다.

이와 같은 '교통 약자'에게 거리는 지뢰밭과 다름없다. "외출 한번 마음 놓고 하기 힘들다"는 이들은 크고 작은 문제를 고쳐나가기 전에 교통 정책의 기조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차량 중심의 정책이 사람 중심으로 바뀌고, 교통 약자를 위한 지원이 시혜가 아닌 당연한 정책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교통 약자가 안전하게 외출하는 날이 곧 모든 시민이 안전한 교통 환경을 누리는 날이라고 말한다.

■이름뿐인 보호구역

지난 1월 부산 동구 자성대 교차로에서 70대 노인이 무단횡단을 하다 택시에 치여 숨졌다. 경찰 관계자는 "나이가 들수록 속도에 대한 인지 능력이 떨어지고 신체 반응이 느려지는데, 젊을 때를 생각하며 무리해서 길을 건너다 변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고 전했다.

이 같은 사고 예방을 위해 정부는 2008년부터 노인보호구역인 '실버존'을 운영 중이다. 요양원과 복지관 주변이 대상으로 부산에는 2015년 4월 현재 55곳이 있지만 유명무실하다. 실제 차량 통행이 잦은 부산진구의 한 노인복지관 앞 실버존에서 속도(시속 30㎞ 미만)를 지키는 차량은 거의 없다. 실버존이 어떤 곳인지 아는 시민은 드물다.

어린이 보호구역인 '스쿨존'은 사정이 낫지만 여전히 위험하다. 현재 부산엔 879곳이 운영 중으로 범칙금을 배 가까이 부과하는 등 엄격한 관리와 단속을 벌이지만 올해 들어 지난달까지 부산에서 어린이 교통사고만 8건이 발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절반 수준이지만 그래도 끊이지 않는다. 우리나라 어린이 교통사고 사망자는 인구 10만 명당 2.0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1.4명에 비해 43% 더 높다.

■장애인 이동권 확보 요원

교통 약자 중에서도 장애인의 이동권 확보는 더욱 요원하다. 제청란 함세상장애인자립생활센터 사무국장은 "불편한 점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저상버스 확대와 두리발 택시의 공공성 강화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휠체어 이용자들에게 꼭 필요한 저상버스는 지난해 말 기준 부산시내버스 총 2500여 대 가운데 391대(16%)에 불과하다. 서울이 33%인 점을 고려하면 절반 수준이다.

숫자가 적다 보니 배차 간격이 길고 모든 노선에 운행되지 않는다. 보편적이지 않아 운전하기에 낯선 버스 기사도 많다. 부산시는 해마다 저상버스를 수십 대씩 늘리고 있지만 경사도가 높고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 부산의 지형 특성을 이유로 보편화에 소극적인 자세다. 저상버스는 차체가 낮아 울통불통한 곳을 이동할 때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장애인 콜택시인 두리발 역시 마음 편히 이용하기 힘들다. 부산시의 지원을 받지만 택시운송사업조합이 운영하는 만큼 수익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운행 대수도 117대로 부산시의 장애인 특별교통수단 관련 조례에서 정한 기준인 187대에 미치지 못한다.

부산의 두리발 보급률은 광역시 가운데 중하위권 수준이다. 제 국장은 "공공성을 강화하려면 운행건수별로 기사에게 수당이 나가는 방식을 바꾸고 공공성을 띤 기관이 운영을 맡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 모든 버스는 저상…정책은 장애인 불편없게, 통학버스 운전자 엄격 선발

■ 교통정책 선진국에선

"모든 버스가 저상버스고 휠체어를 탄 승객은 버스기사가 끝까지 안내를 돕습니다. 시민은 재촉하거나 눈치를 주기는커녕 당연하게 받아들이죠. 다른 차량이 경적을 울리지도 않습니다."

4년 전 가족과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 A(43) 씨가 말했다. A 씨는 장애를 앓는 아들을 위해 이민을 결심했다. 그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은 물론 정책적 배려가 없는 한국에서 아이를 키울 자신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곳에서 장애인은 장애라는 특징을 지닌 시민 정도로 인식하므로 교통정책도 당연히 이들의 불편이 없도록 짠다"고 설명했다. 정책과 시민의식이 뒷받침된 결과다.

어린이를 위한 정책도 빈틈없다. 캐나다의 통학버스 운전기사는 자격증을 취득해야 하며 교통법규 위반 전력이 없어야 하는 등 엄격한 선발 과정을 거친다. 다른 운전자도 통학버스와는 안전거리를 철저하게 지킨다. 통학버스를 추월하면 벌금을 내야 한다.

서울시는 시각장애인이 관공서를 방문하거나 직장에 출퇴근할 때 이를 보조하는 심부름센터를 운영한다. 시각장애인은 장을 보거나 여가를 즐길 때도 이를 이용할 수 있다.

노인 교통안전을 위한 정책도 교통 선진국마다 다양하다. 싱가포르는 2009년 '그린 맨 플러스(Green Man Plus)'를 도입했다. 이는 교통약자 카드를 보도에 설치된 리더기에 대면 횡단보도 운영 시간을 최고 13초까지 늘리는 프로그램이다. 이 외에도 교통 선진국가에서 '실버존'과 유사한 노인보호구역을 지정해 운영 중이다. 도로를 평탄하게 정비하거나 장애물 제거 등에도 노력을 기울인다. 또 일정 나이 이상이 되면 면허증을 갱신하도록 하거나 교육을 의무화해 교통안전을 유지한다.


# "장애물이 없는 도로, 배려가 아니라 당연"

■ 부산참여연대 민남순 팀장

지난 12일 부산참여자치시민연대와 부산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부산시민공원에서 장애인 보행권 시민체험 활동을 진행했다.

이날 모인 60여 명의 시민은 휠체어를 타고 이동을 하거나 안대로 눈을 가리고 걸어보며 평소 당연하게 누리는 보행권이 장애인에게는 없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2012년부터 보행권 확보 운동을 펼친 부산참여연대 풀뿌리운동본부 민남순(사진) 팀장은 "장애인에게 편안한 길은 일반 시민에게도 편안하다"며 "장애물이 없는 도로환경 조성은 배려나 복지가 아니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고 주장했다.

이날 행사에서 민 팀장과 시민은 부산시민공원에서 위치 감지와 방향 전환 등의 용도인 점자블록 단절, 규정을 벗어난 높은 보행 턱, 휠체어 두 대가 지나지 못하는 장애물 사이의 좁은 폭 등 문제점을 발견했다. 이 같은 불편은 공원 밖인 도로교통환경에서 더욱 심하게 드러난다.

민 팀장은 "참여자들이 직접 체험하고 나서야 보행권 확보 정책이 필요하다고 절실히 느낀다"고 전했다.

육교 없애기, 도시철도 승강기 설치, 보도블록 실명제 등 크고 작은 문제 해결에 성과를 낸 풀뿌리운동본부는 올해 도시철도 환승 구간을 포함한 역 시설 점검을 계획 중이다.

승강기가 필요한 곳에 설치됐는지, 점자 안내는 잘 돼 있는지, 지나치게 우회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등을 살펴서 도로 위 장애인이 맞닥뜨리는 벽을 하나씩 없애 나갈 예정이다.

민남순 팀장은 "무엇보다 시 교통정책의 방향이 차량보다 사람 중심으로 짠다면 보행환경은 지금보다 크게 좋아질 것"이라며 "이에 따른 부산시의 적극적인 시책을 앞으로 기대한다"고 주문했다.

공동기획 : 부산시·부산경찰청·부산교통공사·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