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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봄 김창호와 함께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에 도전하기 전 베이스캠프에서의 서성호. |
- 등반의 상업적 이용 싫어
- 아웃도어 업체 등 지원 거절
- 베이스캠프서는 의사노릇
- 주검 내릴 때 현지인들 애도
어느 산악인은 말한다. '등반가란! 수평의 대지에서 태어나 그 땅에서 살도록 된 운명을 거부하고 수직의 세계를 꿈꾸는 자들이다. 히말라야가 있다는 이유로 그곳을 가고 싶어 한다. '악마의 입'이라 불리는 크레바스, 모든 것을 흔적 없이 삼켜버리는 눈사태 등 삶과 죽음을 가르는 그곳을 올라 텅 빈 공간의 정점에 서고 싶어 한다. 속세로 내려와서는 살아 있음에 감격하는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이들이 바로 등반가다'.
한국 고산 등반계의 차세대 주자로 주목받던 서성호가 그랬다. 산을 접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겠다던 그의 각오도 원초적인 욕구를 억제하지 못했다. 2008년 결국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인 히말라야 등반에 나섰다. 키 173㎝ 몸무게 65㎏, 고산 등반가에게 딱 맞는 체구를 가졌던 그는 고소 적응능력 또한 뛰어났다. 6000m대든 8000m대든, 짐이 무겁든 가볍든 등반 속도가 일정했다.
그는 8000m급 13좌에 도전, 안나푸르나1봉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의 시도로 정상에 올라 93%의 성공률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히말라야 등반 사상 영원히 깨지지 않을 성공 신화를 남긴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 1년 반이란 세월이 지났다. 비록 33살의 젊은 나이였지만, 그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는 것은 뛰어난 등반실력보다는 순수 알피니즘을 추구한 진정한 산악인이였기 때문이다.
'다이내믹 부산 희망원정대'가 2011년 단일팀 세계 최초로 8000m급 14좌 완등에 성공하자 국내외 산악계는 서성호의 14좌 완등에 기대를 걸었다. 남은 2개 봉을 2013년 여름까지 오르면 세계 최단기간 14좌 완등은 떼 놓은 당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고귀한 알피니즘이나 인간적 휴머니즘과는 다른 차원인, 속세의 기록에 지나지 않는 14좌 완등 타이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당시 국내 모 아웃도어 업체에서 비상임을 조건으로 원정 지원을 제안했으나, 생명을 담보로 한 자신만의 순수한 등반 영혼이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것이 싫다며 거절했다. 또 네팔인 최초로 8000m급 14좌를 완등한 밍마 셰르파가 낭가파르바트 등반 때 부산팀의 도움을 받았던 보답으로, 2012년 서성호가 오르지 못한 K2와 브로드피크의 상업등반대를 모집하면서 특별 초청했지만, 정중히 사양했다.
그는 진정한 휴먼 알피니스트였다. 자신이 힘든 것은 참을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이 힘든 것은 참지 못했다. 베이스캠프에서 그는 항상 바빴다. 외국팀의 솔라 시스템을 고쳐주는 사소한 일부터 의사 노릇까지 했다. 심지어 제 몸 하나 간수하기 버거운 7000m대의 고소캠프에서 힘겹게 올라오는 외국팀을 보면 캠프사이트를 깎아놓기까지 했다. 이것이 그의 성품이었다.
특히, 경제적으로 우월하다고 현지인들을 막 대하는 이들을 가장 싫어했던 그는 고소포터 쿡 키친보이 등과 친숙하게 지냈다. 그들은 철수할 때면 아껴뒀던 식량, 장비 등을 선물로 건네며 우정을 나눴다. 에베레스트 사우스콜에서 운명하던 날 많은 외국 산악인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그의 주검을 캠프2로 내릴 때 고소포터들은 물론 쿡들까지 마지막 캠프로 올라왔다고 한다. 그가 베풀었던 온정에 대한 답례였다.
그는 죽음을 앞둔 마지막 순간까지도 순수 알피니즘을 추구한 진정한 등반가였다. 무산소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선 뒤 기진한 상태로 마지막 캠프로 내려왔을 때 동료는 여러 차례 산소마스크를 쓰라고 권했다. 그러나 그는 목숨보다 무산소 등정이란 기록을 더 소중히 여겼다. 보통 사람들은 "아무리 그래도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단 말인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공산소를 사용하면서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것은 8000m급 산을 6000m급으로 낮추는 행위다"고 강력히 비난했던 에베레스트 무산소 초등자 라인홀트 메스너의 주장을 신봉했던 그는 끝내 산소를 사용하지 않았고, '해발 0m에서 세계 최고봉까지'의 무동력 극한 등반의 성공을 택했다.
서성호의 마지막 등반이 된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은 애초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부산팀의 8000m급 14좌 완등 이후 보통사람으로 살던 그에게 김창호가 도움을 청했다. 이에 11개 8000m급 고봉을 오르며 생사를 같이 했던, 친형제나 다름없던 김창호의 무산소 14좌 완등을 돕기 위해 기꺼이 함께했다.
서성호의 영원한 등반 파트너 김창호는 "성호는 나보다 10살 아래 동생이다. 14좌 완등에 관심이 없다는 대답으로 괘씸한 후배였을지 모르지만, 그는 세상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고 깊은 곳을 보았던 산악인이었다. 내가 그를 존경하는 이유다"라고 그를 떠나보내는 가슴 아픈 심경을 토로했다.
어려운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산에 대한 열정을 식히지 않았던 그는 늘 입버릇처럼 "나중에 나처럼 어려운 후배 산악인들을 돕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애오라지 산이 좋아 산에 살았던, 그래서 산이 돼버린 그의 못다 이룬 산악 혼을 다시 피우고자 발족한 (사)서성호기념사업회의 활동을 통해 부산에 제2, 제3의 서성호가 탄생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부산산악연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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