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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가을 '다이내믹 부산 희망원정대'의 안나푸르나 1봉(8091m) 원정에서
북벽 등반 중 휴식하는 서성호 대원. |
- 다이내믹 부산 희망원정대
- 14좌 완등 레이스 1등 공신
- 에베레스트 등정 새 기록도
- 하산 중 텐트서 목숨 잃어
- 평소 희생정신 산악계 모범
- 애도물결·추모사업회 발족
2013년은 한국인의 히말라야 등반사에 승리와 비극이 점철된 한 해였다. 승리의 정점은 '해발 0m에서 세계 최고봉까지' 무동력 극한 등반에 도전한 김창호 서성호가 인공산소의 도움 없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 한국 산악계의 오랜 숙원을 푼 것이었다. 이로써 김창호는 한국인 최초로 8000m급 14좌 무산소 완등의 위업을 이뤘다. 한국 산악계의 위상을 드높인 낭보 하루 만에 하산하던 서성호가 해발 7890m의 텐트 안에서 유명을 달리함으로써 환호는 슬픔으로 바뀌었다.
서성호(1979~2012). 그는 단일팀 세계 최초로 8000m급 14좌 완등의 쾌거를 이룬 '다이내믹 부산 희망원정대'의 1등 공신이었다. 2006년 에베레스트 등정을 시작으로 2008년부터 선배 김창호와 환상의 조를 이뤄 14좌 완등 레이스를 펼쳤다. 5년 만에 12개 고봉을 올랐다. 14좌 가운데 파키스탄 히말라야의 K2(8611m)와 브로드피크(8047m) 2개 봉만을 남겨 놓은 상황이었다.
부산의료원에 차려진 분향소에는 30대 초반의 꽃다운 나이에 지상 가장 높은 곳에서 영원히 산이 되어버린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산악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이어 부산 산악계는 서성호의 못다 이룬 꿈을 실현하기 위한 기념사업회를 발족했다. 이같이 많은 이가 그를 추모하고 기리는 것은 그의 산악 인생이 힘겹게 걸어온 여정 속에서도 희생적인 활동으로 산악계의 모범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1998년 부경대에 입학하면서 얼떨결에 산에 발을 들여놓았다. 산악부 동아리 방을 기웃거리다 쓰게 된 입회원서도, 술김에 약속한 산행도 모두 우연이었다. 하지만 첫 산행인 금정산 무명암 암벽등반 이후 마약과도 같은 산에 빠져들고 말았다. 주말, 하계, 동계로 이어진 산행에 빠짐이 없었다. '제어계측과' 학생이 아니라 '산악과' 학생으로 착각할 정도로 산에 심취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 부친은 오랜 세월 중병을 앓았고, 모친은 따로 살았기에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대학 1학년을 마치고 휴학하면서 다음 학기 등록금뿐만 아니라 생활비를 벌기 위해 건설현장 막노동과 목욕탕 때밀이도 했다. 군 복무 중 부친은 결국 세상을 뜨고 말았다. 복학 후에도 학비는 물론 하나뿐인 남동생의 건사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닥치는 대로 했다. 그런 와중에도 산악부 후배들을 이끌려면 무엇보다 체력이 좋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밤이면 운동장을 달리고 철봉에 매달리는 등 산에 대한 열정은 더욱 뜨거워졌다.
가정 형편 때문에 학업을 중단한 적도 있지만, 산을 가기 위한 휴학도 마다치 않았다. 2004년 봄 또다시 휴학계를 내고 북미 최고봉 매킨리 원정길에 올랐다. 하얀 산에 대한 꿈에 부푼 첫 해외 원정이었다. 그러나 순탄하게 진행되던 등반은 안동대 팀의 조난사고로 구조에 참여하면서 등정 시기를 놓쳐 버렸고, 이후 악천후로 등반은 끝내 허락되지 않았다. 더욱이 코끝에 동상까지 걸렸다. 매킨리에서 쓴잔을 마시고 돌아온 그는 그해 여름 대한산악연맹의 '한국 청소년 오지 탐사대'에 참가, 20여 일간 파미르고원의 알라이 산맥을 탐사하면서 매킨리에서의 복잡했던 심경을 달랬다.
심기일전한 그에게 다시 해외 원정 기회가 왔다. 부산지역 5개 학교(경남공고, 동의공고, 경남정보대, 동주대, 부경대) OB산악회에서 합동대를 꾸렸다. 원정대의 막내였던 그는 선배 4명과 함께 에베레스트 기슭에 있는 푸모리(7138m) 정상에 섰다. 그러나 함께 오른 두 대원이 하산하다 설벽 아래로 사라졌다. 누구보다도 컨디션이 좋았던 그였지만 구조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어두워진 시간대에, 제2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그는 아픈 마음으로 울음만 삼켜야 했다.
젊은 나이에 참가한 두 차례의 원정에서 고산의 아름다움을 맛보고 등정의 기쁨을 누리기보다는 험난함과 비정함을 깨우쳐야 했던 그는 푸모리를 등지면서 다시는 산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세월이 약이라고 푸모리의 고통스러운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잊혀서 하얀 산에 대한 동경심이 되살아났다.
2006년 또다시 히말라야 원정의 기회가 찾아왔다. 부산산악연맹이 추진한 에베레스트 원정대원으로 선발됐다. 당시 대원 가운데 8000m급 고산등반 경험자가 적어 약체 원정대란 평을 받았지만, 그는 티베트 쪽 북릉~북동릉 루트를 통해 보란 듯이 지구의 용마루에 섰다. 그리고 남쪽 기슭에 솟아오른 푸모리를 바라보며 잠시 회한에 젖었다. 고인이 된 두 선배의 사진을 눈 속에 파묻으며 그들의 넋을 위로했다.
서성호는 세계 최고봉 등정으로 부산을 대표하는 고산 등반가로 성장할 것으로 부산 산악계의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먹고사는 일이 더 급했던 그는 10년 만의 대학 졸업을 앞두고 고산의 꿈을 접고 평범한 샐러리맨의 길을 택했다. 이듬해 예정된 K2, 브로드피크 등반은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다. 그가 참가하지 않은 원정은 성공리에 끝났다. 이 기간에 그는 직장 일에 매달렸지만, 마음은 항상 히말라야로 향했다.
부산산악연맹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