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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와의 대화 <11> 소설가 이규정

"문화재단 이사장, 얼굴마담 아닌 자금 끌어올 활동가가 맡아야"

  • 국제신문
  • 강필희 기자 flute@kookje.co.kr
  •  |  입력 : 2014-11-26 19:35:21
  •  |  본지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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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규정 선생이 부산 수영구 자택의 글방에서 작가의 사회적 책임과 지역 문화계 전반에 관해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백한기 선임기자 baekhk@kookje.co.kr
- 市, 의견 수렴도 없이 독단적 임명
- 민간 이사장제 도입 취지와 안맞아

- 오페라하우스 등에만 투자 말고
- 폐쇄 위기 지역문학관도 지원을

- 몽골서 '神醫'로 불린 이태준 선생
- 삶의 궤적 추적한 장편 소설 탈고

부산 수영구 망미동에 있는 선생의 자택을 방문한 때는 늦가을 해가 중천을 한참 넘어선 오후 3시께였다. 소설가 이규정(77) 선생은 약간 어둑한 방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오느라 고생하셨죠." 빗어넘긴 백발이 정갈했다. 50평 가까운 넓이에 방이 네 칸이나 되는 아파트였지만, 절반 이상이 책이다. 올해로 등단 38년째인 선생의 과거와 현재였다. "한 1만 권은 넘을 거예요. 여기 온 지 20년이 넘었는데 이사를 한다 해도 책 때문에 힘들 것 같습니다."

선생의 작업실은 현관 바로 옆, '흰샘글방'이라는 팻말이 붙은 4평 남짓의 방이었다. '흰샘'은 하얀 샘물이라는 뜻의 아호다. 책상 정면에 아버지 사진이 걸려 있다. "작고하신 아버지가 쓰던 방입니다. 다 늙은 아들이 조금만 늦게 들어와도 잠도 안 주무시고 기다리곤 하셨지요. 그 체취가 남아있는 이곳에서 특별한 일 없으면 온종일 글 쓰는 게 일입니다."

선생은 얼마 전 소설 한 편을 마무리하고 출판사에 원고를 넘겼다. 내년 3월 출간 예정인 '번개와 천둥'이라는 장편소설이다. 몽골에서 '활불'(活佛) '신의'(神醫)라고 칭송받는 한국인 의사 이태준 선생의 일대기를 그렸다. 세브란스의학교를 졸업한 뒤 도산 안창호 선생을 치료한 인연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태준 선생은 우여곡절 끝에 중국을 거쳐 몽골에 정착, 일본군 장교에게 암살되기까지 몽골인들의 성병 치료에 일생을 바쳤던 실존 인물이다.

"2001년 7월 한국소설가협회 회원들과 함께 몽골 울란바토르에 들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근데 현지 가이드가 '이곳에 이태준공원이라는 곳이 있다'고 알려줬습니다. 알고 보니 선생의 고향이 저와 같은 경남 함안이었어요. 막상 가보니 너무 관리가 안 되고 있더군요. 안타까웠죠."

한국으로 돌아와 함안에서 선생의 흔적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직계후손도 친척도 지인도 만날 수 없었다. 때마침 모교인 연세대학교에서 선생의 행적을 발굴해 홍보하기 시작했고 한국외국어대의 한 교수가 이태준 선생에 관한 논문을 써냈다. TV에서 관련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기도 했다. 선생은 2010년 한 번 더 몽골 현지답사를 다녀와 이태준의 일대기를 소설로 엮었다.

하루 네 시간 이상 작업을 했는데도 소설이 완성되기까지 몇 년이 걸렸다. "2년 전이죠. 한창 물이 올라 글을 쓰고 있을 무렵인데, 그만 교통사고가 크게 났어요. 이후로는 고질병인 위장과 장에 탈이 나 시간이 더 걸렸습니다. 요즘은 기억력도 자꾸 없어지고. 좀 걱정이 돼요." 이마엔 아직도 흉터가 선명하다.

나이와 건강…. 세월의 무게를 탓하며 일선에서 물러나 있을 핑계는 많을 법했다. 그러나 선생은 소설가로서 여전히 현역이며, 사회 참여와 현장 문제에서도 여전히 맨 앞줄에 서 있다. 특히 요즘 부산 문화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가 나오자 노안이 반짝였다.


-부산시의 부산문화재단 민간 이사장 선임을 비판하는 원로 문화인 성명서에서 선생님의 이름을 봤습니다. 범시민대책위도 꾸리셨지요.

▶현재 민간 이사장직에 임명된 분과는 개인적으로 친합니다. 나름 지역 문화예술계에서 오랫동안 일을 한 분이지요. 하지만 너무 식상하고 부적절한 인사입니다. 문화인들의 의견 수렴도 없이 부산시가 독단적으로 결정했어요. 시가 지역 문화인들을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이러겠어요. 얼마 전에는 젊은 여성 시인이 머리까지 깎았어요. 문화인의 절규랄까 분통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문화 관련 단체에 예술인을 임명하지 않는다고 반대하는 것은 많이 봤는데, 이번에는 예술인이어서 안 된다니 얼른 납득이 안 됩니다.

▶부산문화재단 민간 이사장이라는 자리의 성격을 알아야 해요. 여기는 얼굴마담이나 하고 폼이나 재는 자리가 아니에요. 문화재단의 부족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본인도 약간의 희사를 각오하고 현장에 뛰어다니면서 자금을 끌어올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수십 년간 지역에서 이 단체 저 단체 장(長)은 도맡아 한 사람을 또다시 그 자리에 앉히는 것은 민간 이사장제의 취지에 어긋난다는 겁니다.

-지역 문화계에서 따로 염두에 두고 있는 인물이 있는지요.

▶그런 건 없습니다. 우리는 순수하게 민간 이사장제의 취지를 살리자는 것뿐입니다. 그러려면 재력도 있고 자금 동원력도 있고 인맥도 넓고 나이도 좀 젊은 게 좋겠다는 생각이지요.

-부산시의 문화 정책이나 문화인에 대한 대접에 불만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부산에 문학관이 두 곳 있어요. 요산문학관과 향파문학관입니다. 두 곳 모두 부산시가 너무 무관심합니다. 요산문학관은 요산문학축전에 지원되는 시비가 17회째 3000만 원으로 똑같다고 해요. 말이 됩니까. 향파문학관은 재정이 어려워서 곧 문을 닫을 지경입니다. 오페라하우스 같은데 투자는 아끼지 않으면서 기왕에 지어져 있는 문화시설에 대한 지원은 너무 인색합니다. 다른 시·도에 비해 부산은 무식하다 할 정도로 짜요. 음지에 있는 예술인들에게 더 신경을 써야 합니다.

선생은 '우리들의 가면무도회'라는 산문집에 실린 글에서 "아버지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나는 훨씬 더 과감하게 움직였을 것이다. 많은 교수들이 해직되고 징역을 사는 판이었는데도 나는 팔자 좋게 현직 교수란 이름을 그냥 유지하고 있는 자신이 늘 부끄럽고 미안했다"고 고백했다. 그래서일까. 작가로서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민족작문학가회의 전신)에, 교수로서는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창립 멤버로 들어가 시국 문제의 희생자가 되어 해직된 교수와 당시 정권에서 덮어씌운 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는 문인들을 도왔다. 부산참여자치연대 초대 공동대표와 (사)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직을 맡아 시민사회단체 활동에도 앞장섰다.

선생은 특히 '보도연맹' 사건으로 여러 차례 고초를 겪었다. 당숙이 보도연맹 사건에 연루돼 처형된 이후 그 직계는 물론, 선생에까지 연좌제의 여파가 미쳤던 것. 공립고교 임용과 대학교수 임용이 무산될 뻔했다. 이후 보도연맹 문제는 선생의 소설을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가 됐다. 당시엔 갈 수 없는 땅이었던 러시아 사할린을 2주간 답사한 뒤 완성한 3부작 장편 '먼 땅 가까운 하늘'(1996)이 대표적이다.

-그런 일을 겪으면 트라우마 때문에 정반대로 보수적인 견해를 취하기 쉬울 것 같은데 선생님은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도 많지. 그러나 난 그럴 수가 없었어요.

-작가에게도 사회적인 책임이 있다고 보시는지요.

▶종교가 현실을 외면할 수 없듯이 소설도 현실과 유리될 수 없습니다. 최소한 저의 가치관으로는 작가의 현실·역사의식이 살아 숨 쉬어야만 독자에게 의미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후배 작가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신춘문예 작품 심사를 하다 보면 외래어가 너무 많아요. 한글에 대한 주체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유명한 드라마 작가의 작품을 봐도 '미국에 들어간다' '한국에 나간다'는 식의 표현을 아무 의식 없이 쓰고 있어요. 정체성의 혼란이죠. 모국어에 대한 사랑과 애착을 가져달라고 꼭 말하고 싶어요.


■ 이규정 소설가는 누구

경북대 사범대 국어과 재학 당시 문리대 국문과 교수였던 김춘수 선생의 '소설론강의'를 청강하며 문학도의 꿈을 키웠다. 교사 임용 이후엔 부산 남여상에서 청마 유치환 선생을 교장으로 모셨고 문학 수업에 도움을 받았다. 요산 김정한 선생을 만난 것은 동아대 대학원에서였다. 당시 김정한 선생은 부산대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 동아대에 출강했다. 이때 2년간 소설 작법은 물론 작가로서의 비판적 자세와 저항정신을 배웠다고 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이규정 선생과 친분이 두터운 소설가 조갑상(경성대) 교수는 "현실 역사에 천착해 아직도 그 나이에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요산 선생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존경스럽다"고 했다. 문학평론가 남송우(부경대) 교수 역시 "공의가 무엇인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보여준다. 작가의 삶과 작품이 따로 놀지 않고 일치하는 보기 드문 사례"라고 평했다.

▷경남 함안 출생(1937) ▷경북대 사범대 국어과, 동아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부산여대(현 신라대) 국어교육과 교수 ▷'부처님의 멀미'로 등단(1977) ▷부산참여자치시민연대 초대 공동대표, (사)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 부산소설가협회장 등 역임 ▷'아겔다마' '먼 땅 가까운 하늘' '멀고도 먼 길' '치우' 등 집필 ▷일붕문학상 부산시문화상 한국가톨릭문학상 요산문학상 이주홍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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