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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7월 청봉산악회 성박치(왼쪽) 회원과 설악산 대청봉에 오른 송준행(오른쪽). |
- 동료와 나비바위 개척 등
- 지역 기술등반 대들보로
- 마나슬루 원정 부산대표 참가
- 캠프 대기 중 폭설 덮쳐 희생
- 암벽훈련장 미륵암 아래 암장
- '준행암' 이름 붙여 넋 기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름도 생소한 마나슬루(8163m)라는 산에 한반도가 경악했다. 1971, 1972년간 한국 산악인 5명이 이 산에서 목숨을 잃었다. 1972년의 조난사고는 당시 히말라야 등반 사상 두 번째 대참사였다. 이 사고 이후 한국 산악계의 히말라야 원정은 한동안 충격과 실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좌절과 회한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1970년 한국 최초로 히말라야에 도전, 추렌히말 동봉(7371m)을 세계 최초로 올랐다고 주장해 국내외 산악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김정섭 대장은 1971년 마나슬루에서 돌풍으로 동생 기섭을 잃었다. 이듬해 동생 호섭과 예섭을 비롯한 12명으로 원정대를 꾸려 마나슬루 재도전에 나섰다. 부산에서는 청봉산악회 송준행 회원이 대원으로 참가했다.
원정대는 계속되는 폭설로 고전하다 등반 시작 20여 일 만에 정상으로 이어지는 북동릉에 마지막 캠프를 세웠다. 정상까지는 고도차로 불과 900여 m. 이들은 세 팀의 등정조를 뽑았다. 송 대원은 2조에 편성돼 동료와 함께 캠프3(6500m)에 머물렀다. 그런데 다음 날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폭설로 변했고, 시간이 갈수록 적설량은 많아져 모든 캠프에 1m가 넘는 눈이 쌓였다.
이날 밤 폭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눈더미가 18명(대원 6명, 고소포터 12명)이 자던 캠프3을 덮쳤다. 18명 중 텐트 밖에서 눈을 치우던 2명의 고소포터는 눈사태에 100여 m를 쓸려가다 천행으로 빠져나왔고, 김예섭 대원은 1100m나 추락한 뒤 기적적으로 구조됐다. 대원 5명(일본인 1명 포함)과 고소포터 10명 등 무려 15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 조난사는, 1934년 낭가파르바트(8125m)에서 독일대의 대장 이하 16명(대원 7명, 고소포터 9명) 전원이 눈 속에 묻힌 이후 히말라야 등반 사상 두 번째 대참사였다.
한국 히말라야 원정 초창기를 이끈 김 대장은 두 차례에 걸친 등반에서 두 동생을, 부산 산악계는 유능한 클라이머 송준행을 히말라야에 묻어야만 하는 비운을 맞았다. 당시 청봉산악회 성박치 회원이 운영하던 돌샘산장에 보름간 차려진 분향소에는 부산지역 기술등반 선두주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해 여름 청봉산악회는 조의금으로 고인을 기리는 추모비를 금정산 북문산장 앞에 세웠다.
부산 산악인으로서는 히말라야 첫 도전자이자 첫 희생자로 기록된 송준행(1941~1972). 부산 중구 보수동에서 태어난 그는 경남중, 경남공고를 나와 부산대 화학과를 졸업했다. 1966년 ROTC 2기로 군 복무를 마친 뒤 초등학교와 중학교 동기로 한동네에 살았던 죽마고우 성박치와 한양대 산악부 출신 김익명의 영향으로 산에 발을 들여 놓았다. 이어 한양대 산악부에서 활동했던 이경천을 만나면서 암벽등반에 눈을 뜬 그는 1968년 청봉산악회 창립멤버로 본격적인 산악인생을 시작했다.
산악회를 만든 뒤 그가 맨 먼저 한 일은 금정산 나비바위 개척이다. 주말이면 회원들과 함께 바위에 매달려 땀을 흘리며 슬래브, 크랙, 침니 등의 다양한 바윗길을 만들어 암벽기술을 익히며 후배들을 모았다. 이어 다른 암장으로 영역을 넓혀 금정산 무명암 리지와 천태산 슬래브 등의 루트를 개척, 부산지역 기술등반의 대들보로 자리매김하면서 선후배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청봉산악회는 물론 부산 산악계의 선봉장으로 불렸던 그는 산에 대한 정신 열정 지식 능력 리더십 등 어느 면에서나 부산 최고의 클라이머로 이름 날렸다. 단신으로 힘이 셌던 그는 무쇠로 만든 하켄을 넣은 무거운 배낭을 메고 암벽을 올랐고, 마닐라 로프를 어깨에 두르고 다니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당시 돈으로도 살 수 없었던 동계용 텐트와 암벽등반에 필요한 하켄 줄사다리 등을 직접 설계·제작해 사용한 학구파 등반가였다.
그 당시 마나슬루 재도전을 준비하던 김 대장이 부산 산악계에 원정대원 추천을 의뢰하면서 그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그때까지 한국 산악계는 정찰대를 포함해 겨우 다섯 팀이 히말라야 원정을 다녀왔을 정도로 고산에 대한 등반지식이 거의 없었다. 부산에서는 한국산악회 부산지부와 대륙산악회가 일본 알프스에 다녀온 경험이 고작이었다.
이처럼 고산등반 경험이 일천했던 시절, 부산에 고산 등반가라 칭할 수 있는 산악인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당시 기술등반 선두주자였던 청봉산악회 회원들이 거론됐고, 산악회의 고참이었던 그와 성박치로 좁혀졌다. 그러나 고산등반에 자신이 없었던 성 회원은 정중히 사양했고, 결국 대한산악연맹 부산직할시연맹 총무이사로 활동하던 그가 대원으로 지명됐다. 본의 아니게 부산 대표로 선발된 그는 산악계의 격려에 반쯤 떠밀려 내키지 않은 원정길에 올라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등반 세계로 빠져든 지 6년 만에 히말라야에서 영원히 산이 된 송준행. 그는 금정산에서 산사나이의 애정을 불살랐기에 '금정산의 분신'으로 불렸다. 부산 산악계는 등반가를 꿈꾸는 많은 젊은이의 암벽 훈련장인 미륵암 아래 암장을 금정산을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그의 이름을 따 '준행암'으로 이름 붙여 고인의 넋을 기리고 있다.
부산산악연맹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