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울산 울주군 웅촌면 정족산 아래 휴휴산방(休休山房)이라 이름 지은 자택에서 함께한 최해곤 부부. |
- 1964년 등반대회 참여 계기
- 지도교수 등과 함께 이끌고
- 동아대 산악명문 도약 일조
- 대표상임위원으로 강연 활동
- 2012년 금정대상 수상 영예
부산 등산계 중흥기인 1960년대 대학생으로 활동했던 최해곤(1944~) 선생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부산학생산악연맹 대표상임위원을 맡아 부산에서 제대로 된 학술 강연회를 열고, 연맹회지를 발간하는 등 학생 산악문화 창조에 앞장선 사람이라고 하면 좀 더 기억하는 이가 많지 않을까 싶다.
올해 칠순인 그는 대학 시절 열혈 산꾼이었다. 1964년 동아대에 입학하자마자 산악부에 들어갔다. "당시 한일 굴욕외교와 한일회담 반대 데모가 절정을 이뤄 휴교령이 내린 상황에서 등산대회 준비를 위해 학교 운동장에 군용텐트를 쳤다. 한 팀 선수가 5명이었는데, 선배 대부분이 데모 주동으로 피신해 경험이 전혀 없었던 내가 부산에서 처음 열린 부산학생등산대회에 나가는 행운을 얻었다. 이를 계기로 평생을 산과 더불어 살아왔다"고 50년 전의 기억을 되살렸다.
군 복무를 마친 뒤 1967년 복학한 그는 산에만 다니다 대학을 졸업했다고 할 정도로 산악활동에 전념했다. 이듬해 부산지역 고교·대학 산악부의 체계적 지도와 육성을 위해 창립한 부산학생산악연맹 대표상임위원(재학생 회장)을 맡아 초대 김택진 회장, 김용기 오점량 부회장 등 깐깐하기로 소문난 대학교수들의 지도로 초창기 학생연맹을 이끌었다.
당시 한국산악회 이은상 회장 초청 강연회를 열기 위해 대구로 달려가 승낙을 얻었고, 300여 명이 참가하는 대성황도 이뤘다. 이어 가맹단체의 동정과 등산 기술이론 등을 실은 연맹회지 '산소식'을 창간했다. 또 구성원의 질적 향상을 위해 봄 가을 암벽등반 교실을, 여름에는 산간학교를, 겨울에는 한라산 지리산 등에서 설상·빙벽등반 기술을 연마하는 등 연맹이 학생 산악운동의 요람으로 발전하는 초석을 다졌다.
그는 50년 산악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스승으로 신업재 이원락 두 선생을 꼽는다. 신업재 선생은 한국산악회 초대 경남지부장과 부산산악연맹 초대 회장을 지내면서 부산학생등산대회를 만든 부산 산악운동의 선구자다. 등산대회에 선수로 참가했던 학생이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자연스레 가까워졌고, 그를 친자식처럼 여기며 등산에 대한 인식과 인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 1960년대 등산 대중화에 앞장선 부산산악회 창립 멤버인 이원락 선생은 외국 전문서적을 탐독하게 하는 등 등산에 대한 공부를 일깨워 준 산 선배였다.
이들의 영향을 받은 그는 산악인은 산을 통해 인격을 도야하고, 등산기술과 이론도 겸비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후배 양성에 심혈을 기울여 동아대를 산악명문으로 이끌었다. 특히 동아대는 부산에서 해외 원정대를 가장 많이 파견한 학교로 유명하다. 1990년 안나푸르나 산군의 글레이셔돔(7455m)을 올랐고, 1996년 인도 가르왈 히말의 마나파르바트Ⅰ(6771m)에서 신루트를 통해 2등에 성공했다. 2006년에는 동아대 개교 60주년 기념으로 파키스탄 카라코람에 도전, 가셔브룸Ⅰ(8068m)·Ⅱ(8035m) 연속 등정의 쾌거를 이뤘다. 이후 6대륙 최고봉 등정을 추진, 현재 북미 최고봉 매킨리만 남겨두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2010년 산악부 창립 50주년을 맞아 에베레스트 정상에 3명의 대원을 올렸고, 900여 쪽 분량의 '동아대학교산악회 50년사'를 펴냈다. 이 같은 활동의 중심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동아대산악회 백진국 회장은 "최 선배는 대우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후배들이 더 따르고 존경한다. 또 나이에 관계없이 후배들을 편하게 대해 어떤 주제든 대화로 소통할 수 있는 열린 선배로 후배들의 정신적 지주다"고 밝혔다.
그는 1990년대 중반 30여 년 만에 다시 부산 학생 산악운동 선봉장으로 나섰다. 창립 이래 대학교수나 사회지도층 인사가 연맹을 이끌었으나, 연맹 출신으로서는 그가 처음으로 회장을 맡아 다양한 활동으로 한때 침체됐던 학생연맹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이후 연맹 출신이 회장을 맡는 전통을 세웠다. 이 같은 공로로 2012년 금정대상을 받았다.
울산 울주군 온산이 고향인 그는 농림부 공무원이었던 부친 덕분에 6·25전쟁 와중에도 유치원에 다닐 정도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부친을 따라 지방을 전전하다 보니 입학과 졸업이 같은 학교는 대학교뿐이다. 그래서 방랑 끼가 있는 등산가가 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1970년대 초 부산산악회에 들어가 선배 여동생과 부부의 연을 맺는 행운을 얻었다. 그의 부인은 춘해대 부총장을 지낸 정경애 교수다. 산악부 지도교수로 활동하며 '등산과 건강' 등의 강연으로 이름을 떨친 아내의 내조 덕분에 그가 편한 산악활동을 했음은 물론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몸담았던 동아대·부산산악회 외에는 다른 산악단체에 일절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생을 정리할 나이인 60대 중반 비로소 부산산악포럼에 그 이름을 올렸다. "한때의 미약한 활동을 앞세워 노령에 산악단체 행사에만 기웃거리는 초라한 선배가 되지 않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고 새 산악 인생을 시작한 연유를 밝혔다.
부산산악연맹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