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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여름 경남공고 OB산악회의 구르카르포리(6889m) 원정 훈련을 위해 금정산에 오른 정상균. |
- 경남공고 산악 명문 이끌고
- 회사 그만둔 채 등반 몰두
- 다이내믹 부산 희망원정대로
- 2005년 히말라야 등정나서
- 후배와 산사태로 조난 당해
- 부산산악인장으로 영결식
등산의 백미(白眉)는 정상을 오르는 것이다. 하지만 등산의 완성은 가족과 소중한 사람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정상은 반환점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지만 반드시 출발점으로 무사히 돌아와야 함에도 히말라야에서 영원히 산이 된 산악인은 많다. 한국 원정대가 히말라야로 향한 지 어언 50여 년. 그동안 6000m 이상 고봉에서 83명이 목숨을 잃었다. 부산에서는 8명이 희생됐다. 그러나 삶과 죽음을 가르는 절대적 위험성 때문에 오늘날 수많은 탐험가가 히말라야를 꿈꾼다.
2005년 봄 부산산악연맹 소속 5개 학교 OB산악회로 꾸려진 푸모리(7138m) 원정대의 정상균(경남공고) 김도영(동의공고) 김명수(경남정보대) 유향미(동주대) 서성호(부경대) 등 5명이 등반 시작 9일 만에 등정에 성공, 남동벽 한국 초등과 한국 여성 초등의 쾌거를 이뤘다. 그러나 세찬 눈보라와 짙은 가스를 뚫고 하산하다 김도영 정상균이 연이어 실족, 추락사했다. 두 대원은 한 줌의 재가 돼 돌아왔고, 부산 산악계는 이들의 도전정신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부산산악인장'으로 영결식을 했다.
특히 50세에 사고를 당한 정상균(1955~2005)은 히말라야에서 조난사한 국내 산악인 중 최고령자로 기록되면서 부산 산악계의 안타까움을 더했다. 당시 한국 산악계는 불혹을 넘긴 나이에 불굴의 의지와 집념으로 젊은 등반가들과 함께 히말라야 거벽에서 등반 혼을 불사르다 간 그의 열정에 찬사와 깊은 애도를 표했다.
부산이 고향인 그는 1971년 경남공고에 입학, 산악부에 들어가 등산에 입문했다. 학창시절 부산학생등산대회를 비롯해 전국 등산대회에 나가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한편, 올바른 등산을 배우고자 일반 산악회에서 활동하며 견문을 넓혔다. 졸업 후에는 후배들을 제대로 키우겠다는 일념으로 동기 김재유 김명신과 함께 1974년 경남공고 OB산악회를 창립, 왕성한 활동으로 경남공고를 전국에서 알아주는 산악명문으로 이끌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더했다. 1960년대 경남공고 산악부를 창립한 선배 조정술을 만나면서 운명적인 고산등반 인생이 시작됐다. 그는 후배들의 히말라야 원정을 물심양면 적극적으로 도왔다. 당시 고교산악부 OB회가 단일팀을 꾸려 히말라야에 도전한 것은 국내 최초였다. 1984년 봄 네팔 히말라야 서쪽 끝에 있는 푸타히운출리(7246m) 정상에 산악부 후배이자 처남인 강영기와 나란히 올라 한국 초등을 이뤄 국내 산악매체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이 등정은 1982년 부산학생산악연맹의 파빌 등정에 이은 부산의 두 번째 개가였다.
1986년에는 세계 7위 봉인 다울라기리(8167m) 동계 등반에 도전해 8030m까지 진출, 한국 초등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정상 바로 밑에서 그를 기다리던 고소 포터가 "꿈에 산신이 나타나 정상에 올라오지 못하게 한다"며 등정을 거부했다. 이에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조정술 대장은 하산 명령을 내렸다.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던 그는 정상을 고도차로 불과 140여 m 남겨두고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후일 그는 통한의 후퇴를 결정할 때가 생애 최고의 어려웠던 순간이었다고 털어놨다.
이후 더욱 진취적인 산악활동을 위해 10여 년간 근무하던 화학펄프 제조업체 동해펄프를 그만뒀다. 그 후 선화학원 이사장인 고모부의 도움으로 선화여상(현 부산컴퓨터과학고)에 구내매점을 차려 자유인이 된 그는 오직 산에만 몰입했다. 산과 관련이 없는 단체에는 일절 참여하지 않을 정도로 등산을 종교로 여기며, 언제든지 히말라야 등반에 나설 수 있는 체력을 다졌다.
몇 년간의 준비 끝에 2003년 가을 인간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은 네팔 랑탕히말의 구르카르포리(6889m)에 도전했으나 예기치 않은 눈사태로 등반을 단념하고 돌아섰다. 이듬해 부산산악연맹이 조직한 '다이내믹 부산 희망원정대'의 에베레스트 대원으로 선발된 그는 다울라기리에서 못다 이룬 8000m급 등정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정열을 바쳤다. 2005년 현지 적응을 위해 원정 경험이 전혀 없었던 후배들과 함께 푸모리에 도전, 20여 년 만에 히말라야 고봉을 다시 밟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운명은 여기까지였다. 등정 후 하산 길에서 속세와의 연을 영원히 끊고 말았다.
부산 고산 등반계의 선두주자로 30여 년간 순수 알피니즘을 추구한 그는 늘 온화한 성품에 유머감각이 뛰어나 부산 산악계의 후배들로부터 '영원한 형님'으로 존경받았다. 항상 겸손하게 산을 바라봤던 그는 자신을 내세우기보다는 묵묵히 전체를 위하는 진정한 클라이머였다. 화려한 말보다 진실을 얘기하려고 애썼고, 원망 아닌 인내를 택한 히말라야만큼 너른 가슴을 가진 작은 거인이었다.
후배 김도영과 함께 푸모리 여신의 따사로운 품 안에 안긴 정상균. 비록 생전에 8000m급 거봉 등정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히말라야의 별이 돼 단일팀 세계 최초로 8000m급 14좌 완등의 쾌거를 이룬 '다이내믹 부산 희망원정대'의 등정 길을 밝혔다.
부산산악연맹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