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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크라이머스 회장을 맡아 2000년 가을 네팔 히말라야 꽝데 북벽 정찰 후 포카라에서 안나푸르나 산군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이종량 씨. |
- 고교시절 부터 등반 시작
- 1년 만에 금정산 암벽 섭렵
- 밀양 백운산 암벽 개척 화제
- 스포츠 클라이밍 심판 활동
- 한국 대표팀 코치 맡기도
우리나라 클라이머들의 활동기간은 거의 10년을 넘기지 못한다. 여러 장애요인이 있으나, 그 첫째가 사회적 여건이다. 학창시절 등반에 몰두하다 10년 남짓 되면 사회에 진출할 나이에 이른다. 클라이밍이란 위험은 고사하고 빵과 거리가 한참 멀어서 대부분 등반을 접고 생활전선에 뛰어든다. 간혹 10년 넘게 클라이머로 활동하는 이도 있지만, 진정한 클라이머라 꼽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래서 밥벌이를 하며 등반을 즐기기는 초인이 아닌 이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 같은 현실을 극복하고 1970년대 초부터 30년 넘게 현역 클라이머로 활동하며 선구적으로 등반활동의 지평을 넓힌 산악인이 이종량(1953~) 씨다. 금성고 3학년 때인 1971년, 천태산 암장에서 우연히 만난 고교동기 권경업의 권유로 당시 금정산 부채바위 개척으로 부산 산악계에서 명성이 자자하던 부산크라이머스에 들어가면서 운명적인 등반 인생이 시작됐다.
키 170㎝, 몸무게 57㎏으로 기술등반에 알맞은 신체조건을 갖춘 그는 암벽등반에 천부적인 소질을 발휘, 1년여 만에 금정산 암벽을 두루 섭렵한 뒤 빙벽등반으로 눈을 돌렸다. 1973년, 당시 국내 최고의 등산학교인 겨울등산학교(한국등산학교 전신)를 나오면서 등반 세계로 깊이 빠져들었다. 설악산 빙폭에서 유럽의 선진 빙벽등반 기술을 익힌 그는 오늘날 부산·경남 클라이머들의 동계 훈련장으로 널리 애용되는 밀양 얼음골 가마불 계곡의 빙벽 개척에 나섰다. 겨울이면 산악회 회원들과 빙폭에 매달려 땀을 흘리며 2년 만인 1974년 등반거리 150여 m의 빙벽을 초등, 부산 등반사에 큰 획을 그었다. 이어 그해 여름에는 부산 산악인들을 초청해 가마불 계곡의 암벽코스를 선보여 갈채를 받았다.
그의 가장 주목할 등반활동은 밀양 백운산 암벽 개척이다. 당시 가마불 계곡을 오르내리다 얼음골 건너편의 거대한 암장을 발견하고, 산악회의 권강수 김윤식 회원 등과 함께 루트 개척에 온 힘을 쏟아 1972년 하단·중단·상단에 바윗길을 열었다. 등반 높이와 난이도가 서울의 인수봉에 못지않아 부산·경남지역 등산학교가 단골로 찾으면서 암벽교육의 요람으로 자리 잡았다. 1974년에는 부채바위 '북벽 B코스'를 개척하면서 이종량이란 이름이 국내 등반계에 널리 알려졌다.
이후 군에 입대하면서 산과는 멀어졌지만, 등반 세계로 향한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1977년 설악산 토왕성 빙폭 초등을 위해 꾸려진 부산 합동대에 특별휴가를 얻어 합류했다. 비록 귀대일자에 쫓겨 완등의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김문식 배종순 대원과 함께 토왕성 빙벽 중단에 설치된 캠프에서 일주일간 머물며 부산팀이 서울 크로니산악회에 이어 2등으로 오르는 데 힘을 보탰다.
군 제대 후에도 직장과 산을 오가며 오직 클라이밍에만 몰두한 그는 설악산 3대 빙벽(대승, 소승, 토왕성)을 비롯해 토왕폭 좌·우벽 등 국내 유명 암장 순례를 통해 기술을 연마했다. 이를 바탕으로 당시 인공 보조물을 이용해 오르던 부채바위 북벽을 1987년 산악회 정예 멤버들과 함께 자유등반으로 돌파했고, 이듬해 부채바위 남벽에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5.13급 루트를 개척해 부산 산악인의 기량을 전국에 떨쳤다. 이어 부산산악연맹 등반기술이사를 맡아 금정산 대륙봉에 새로운 루트를 만들어 '금정암벽대회'를 치르는 등 30대에 부산 등반계의 선두 주자로 이름 날렸다. 이러한 공로로 2006년 금정대상을 받았다.
우리나라 등반가 중에는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사람은 많아도 시대의 흐름을 꿰뚫는 통찰력을 지닌 이는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와 혜안으로 자신의 전문성을 살린 클라이머가 이종량 씨다. 그는 일찍이 일반인에게 생소했던 스포츠클라이밍으로 눈을 돌렸다. 이 경기는 1947년 구소련의 자연암장에서 속도경기를 시작한 것이 그 시초다. 이후 유럽과 미국 등 자유등반이 성행하던 국가가 주축이 돼 서로의 등반 기량을 공정하게 겨룰 수 있도록 인공암벽장에서 대회를 열기 시작, 다른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선수 관객 경기장 규칙 상금 등을 갖춰 독립된 스포츠의 무대로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1980년대 말이다. 오늘날 대중 스포츠로 주목받지만, 전통 알피니즘을 추구하는 등산의 한 장르보다는 스포츠화했기에 당시 국내 산악인 대부분은 등산 철학이 없다며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국제산악연맹이 1991년 일본 도쿄에서 개최한 국제심판 교육에 참가, 국내 최초로 아시아권 심판자격을 얻었다. 이후 싱가포르 중국 일본 등지에서 열린 대회 심판으로 활동하는 한편, 한국대표팀 코치를 맡아 스포츠 외교의 일익을 담당했다.
그뿐만 아니라 부산크라이머스에서 1980년대 초부터 매년 개최한 '클라이밍 스쿨'에 심혈을 기울여 600여 명의 우수한 클라이머를 배출하는 등 부산 산악계 발전에 이바지한 공은 지대하다. 30년 넘게 현역 클라이머로 활동하며 부산 등반계를 풍미했던 그는 2006년 고향 밀양에 있는 부엉새바위 개척을 마지막으로 등반활동을 접고,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
부산산악연맹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