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12월 동료 교수들과 함께 속리산에 오른 김택진(맨 오른쪽) 선생.

- 日 유학 후 26년간 교단에
- 30년간 건축가의 길 걸어
- 동년배 신업재 선생과 교류
- 부산산악연맹 초대 부회장
- 학생산악운동도 깊은 관심

부산 산악단체 최초의 해외 원정기록은 한국산악회 부산지부의 일본 알프스 등반이다. 일본 동경도 등보계류회의 초청으로 김택진 대장 등 5명이 1971년 가을 20일간의 일정으로 일본 알프스를 다녀왔다. 여러 여건상 등산을 목적으로 외국에 나가기엔 많은 제약이 따랐던 시절, 이들의 원정은 부산 등산계의 시선을 끌었다.

부산 최초의 해외 원정대를 이끈 김택진(1907~2000) 선생의 고향은 울산이다. 그의 부친 추전 김홍조 씨는 사업으로 많은 재산을 모아 독립자금을 지원하고 인재양성을 위한 장학사업과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선 개화운동의 선각자로, 학성공원과 작천정을 지역사회에 기부했다. 울산 명문가에서 태어난 선생은 요코하마고등공업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연구과를 수료한 뒤 귀국, 1932년 경남도에 들어가 8년간 근무했다. 1940년부터 부산공업학교(현 부경대)에서 교편을 잡았고, 광복 후 일본 교사들이 물러가자 10년간 교장을 지냈다. 그 후 부산대와 동아대 건축학과 교수를 거쳐 동아대 공대 학장을 끝으로 26년간 봉직하던 교직에서 물러나, 1966년 건축설계사무소를 차려 30여 년간 건축가의 길을 걸었다.

선생은 일본 유학시절 산과 인연을 맺었다. 여가 활용의 한 방법으로 산을 찾다 귀국한 뒤에도 등산에 심취했지만, 등산계의 일선에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건축이라는 학문과 교사 교수로 이어진 직업, 즉 본업에 충실하다 보니 생활의 활력을 얻는 한 방편으로 지인들과 등산을 즐겼다. 특히 부산 등산계의 대부였던 신업재 선생과는 동년배로, 또 같은 일본 유학파였기에 막역하게 지내며 함께 등산을 자주 했다.

하지만 신업재 선생을 주축으로 1946년 발족한 부산 최초의 산악단체인 조선산악회 경남지부 창립멤버로는 참여하지 않았다. 한국 산악계의 원로 손경석 씨는 회고록에서 '한국산악회가 1946년 한라산 학술답사 때 김정태 주형렬 등 백령회 회원들이 신업재 회장에게 지부 결성을 권고했는데, 신 회장의 측근인 김택진 김재문 등이 찬동해 지부 결성을 쉽게 마칠 수 있었다'고 밝혔는데, 당시 부산 등산계에서 선생의 영향력이 짐작되는 대목이다.

부산 산악계는 선생을 등산 동호인으로만 있게 하지 않았다. 광복 후 혼란의 시기에 부산공업학교 교장을 맡아 학교의 기틀을 다졌던 것처럼 많은 사람에게 자신이 필요할 때는 서슴지 않고 나섰다. 특히 동아대 공대 학장 시절인 1964년 '지리산 칠선계곡 등산로 개척 및 학술조사대'의 부대장 겸 학술반 리더를 맡아 전인미답인 칠선계곡의 베일을 벗기는 데 앞장섰다. 또 1965년 창립한 부산 최초의 등산연합체인 부산산악연맹 초대 부회장을 맡아 부산 등산운동사에 초석을 놓은 학생등산대회의 발전에도 한몫했다.

그뿐만 아니라 학생산악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고교·대학산악부를 체계적으로 지도·육성하고자 1968년 결성된 부산학생산악연맹의 초대 회장을 맡아 자신이 운영하던 설계사무소에 연맹회관을 마련하고 활발한 활동을 폈다. 교육자답게 창립기념 산행을 호포, 금강공원, 부산대, 범어사 등 네 곳에서 나눠 출발해 고당봉에서 만나는 집중식으로 치렀다. 연맹 첫 사업으로 노산 이은상 한국산악회 회장을 초청, 산악강연회를 개최했다. 여름에는 하계 산간학교를 열고, 겨울에는 합동훈련을 하는 등 학생연맹이 학생산악운동의 요람으로 발전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부산학생산악연맹 대표상임을 지낸 최해곤 동아대산악부OB는 "학생들의 학구적인 산행에 격려를 아끼지 않던 선생은 언제나 차분하고 철저한 분으로 근엄 과묵했다. 등산 장비도 새것보다는 옛것을 사용하는 등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해 학생들이 존경하고 따랐다"고 회고했다.

선생은 전공인 건축에 대한 열정도 대단했다. 특히 건축구조 분야에 일가를 이뤄 자신만의 구조해법을 주창해 '구조해산 룰'을 만들어 이를 바탕으로 '건축구조해법'이란 책을 발간했는데, 대학 교재로 채택되기도 했다. 또 광화문 복원을 위한 대대적인 수리가 시작됐을 때 소장하고 있던 옛적 실측 청사진을 문화재청에 제출, 큰 도움을 줬다. 광복 후 건축단체 창립에도 큰 역할을 했다. 특히 1947년 대한건축학회 경남지부를 결성, 초대 회장을 맡아 부산·경남 건축문화 창달에 정열을 쏟았다.

대한건축학회 부산·경남지회장을 지낸 류종우 부경대 명예교수는 "선생은 한국 건축계의 1세대로 건축에 대해 지대한 관심과 적극적 참여로 모두의 본보기였다. 강직한 성품의 선생은 회의 때 항의하는 이가 있으면 '조직의 틀 속에서 새롭게 지향하는 바에 초점을 맞춰 나아가야지 조그만 불평불만들은 분위기만 해칠 뿐'이라고 질타했다. 모임이 끝난 뒤 교통비를 건네면 '아직도 건강한 내가 회비를 축내면 안 된다'며 한사코 뿌리치는 등 온몸으로 모범을 보인 이 시대 최고의 멋쟁이였다"고 회고했다.

부산에 등산운동이 움틀 무렵 활동을 시작한 1세대 산악인으로 초기 부산 등산계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며 교육자로, 건축가로 부산은 물론 이 나라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선생은 2000년 93세의 일기로 영면했다.

부산산악연맹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