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배 선생의 집에는 50여 년간 수집한 등산서적과 등반장비들이 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 외국서적 읽고 장비 만들어
- 독도법 달인, 기상 전문가
- 본지와 부산 첫 OL대회
- 스키등반에도 해박한 지식
- 전시회에 장비·책 내주기도

부산에 등산 붐이 막 일기 시작할 무렵인 1960년대 초에는 등산서적도, 등산지식을 가진 이도 별로 없었다. 산에 대해 무엇 하나 아는 것이 없었던 시절, 그저 산이 좋아 길을 따라 오르내리는 놀이 성격을 띤 등산이 주류를 이뤘다. 당시 수산(水山) 김옥배(1929~) 선생은 외국 등산서적을 읽고 연구해 등산지식을 전파한 몇 안 되는 부산 산악인 중 한 사람이다.

학교 교사였던 선생이 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62년 부산산악회의 시민안내등산에 참가하면서부터다. 한두 번 산에 오르다 보니 스트레스가 풀렸고, 돈이 적게 드는 취미인 데다 방학 동안에 마음껏 산에 다닐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꼈다. 그래서 부산산악회에 들어갔다. 본격적인 등산을 하다 보니 배울 것이 많았다. 하지만 물어볼 만한 산 선배도, 관련 책도 없었다. 결국, 외국 서적을 탐독하며 등산지식을 스스로 깨우쳐 나갔다. 이론뿐만 아니라 실기도 익히고 장비도 고안해 만들었다. 집에서는 물론 천마산 암벽에서 클라이밍 연마나 새로 만든 장비를 시험할 때면 보조 역할은 언제나 부인의 몫이었다.

이렇게 등산이론을 배우고 실기를 익혀가며 몇 년이 지나자 자연히 산길 찾는 재미에 흠뻑 빠져들었다. 1960년대엔 지금처럼 등산로에 이정표가 없었다. 산에는 나물을 캐거나 땔감을 마련하려는 지역주민들이 다니며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소로뿐이었다. 정확한 개념도가 없었던 때라 독도법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일본 책을 구해 이론을 익히고 지도와 나침판을 들고 산야를 누비기를 여러 해. 독도법의 달인이 된 선생은 부산에서는 생소한 '오리엔티어링(OL)대회'를 기획했다. 1973년 국제신문과 부산산악회가 공동으로 금정산 남문 일원에서 OL대회를 열었는데 이 대회가 부산 OL대회의 효시다. 이듬해 '제9회 부산학생등산대회'의 심판장을 맡은 선생은 OL종목을 신설하는 등 OL이 대중적인 생활체육으로 성장하는 데 이바지했다.

선생은 독도는 물론 기상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래서 이와 관련된 얘기도 적잖다. 1966년부터 매년 금정산에서 열리던 부산학생등산대회를 1970년 신불산 일원에서 개최하려고 평일에 혼자 대회코스 답사에 나섰다. 영축산을 거쳐 배내골로 하산하다가 간첩으로 오인당해 경찰이 뒤쫓기도 했다. 또 언젠가 거제도로 가는 선상에서 단파방송으로 기상예보를 듣고, 쌍안경으로 날씨를 관측하다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받아 장승포항에 내리자마자 경찰에 연행된 적도 있었다.

한편 스키 등반에도 깊이 빠진 선생은 일본 책으로 이론을 배우고 실기를 하나하나 익혀나갔다. 국내에 스키장이 없을 때라 여러 해 한라산에서 혼자 스키기술을 터득했다. 스키에 한창 재미를 붙이고 있던 어느 겨울, 개장한 지 얼마 안 된 용평스키장에서 우연히 김정태 씨와 자리를 같이하게 됐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순수 조선인들로만 구성된 백령회의 주축 멤버로 등산뿐만 아니라 스키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한국의 대표 산악인이었던 대선배와 스키 역사를 시작으로 기술에 관한 이론, 유명 장비의 장단점 등 스키 전반에 대한 논전을 벌였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선생의 스키에 관한 해박한 지식에 깜짝 놀랐고, 논전은 선생의 우세승으로 끝났다.

선생은 부산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문무를 겸비한 대표적인 학구파 산악인이었다. 그렇지만 등산 경력은 남들처럼 그리 화려하지 않다. 1970년대 초부터 10여 년간 부산학생등산대회의 심판을 맡은 것이 전부다. 그래서인지 일각에서는 '부산 최고의 등산 이론가가 후배가 없다'고 애써 폄하하기도 한다. 비록 등산운동의 일선에 나서지 않았지만 등산의 대중화와 활성화에 많은 이바지를 했다. 1970년대 고교·대학산악부는 물론 일반산악회에서는 경쟁하듯 산악전시회를 열었다. 그때마다 거의 똑같은 장비를 선보였는데, 대부분이 선생의 장비였다. 당시만 해도 구하기 어려운 값비싼 외제 장비나 귀한 등산서적을 선뜻 내주는 이는 거의 없었다. 또 독도나 산악기상 세미나 때면 언제나 단골 강사로 나서 등산인의 질적 향상을 위해 열변을 토했다.

부산 중구 영주동에서 태어난 선생은 초등학교 교사였던 부친이 전근할 때마다 경남지역은 물론 멀리 원산, 함흥 등지를 돌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서울에서 중학교에 다니다 2학년 때 병을 얻어 학교를 그만두고 독학으로 학문을 터득했다. 6·25전쟁 때 군에 입대한 선생은 미군 이동외과병원에서 통역관으로 근무한 덕분에 영어는 수준급이고 일어도 능통하다. 부산사범학교(부산교육대 전신) 연수과를 나와 1953년부터 40여 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2세 교육의 일선에 있었으나, 등산에 몰두한 나머지 평교사로 1994년 정년퇴임 했다.

선생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팔순 노구를 이끌고 스키를 즐길 만큼 건강했다. 하지만 요즘은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해 등산 활동은 접었다. 선생의 집 거실 책장에 가득히 쌓여있는 등산서적과 사진첩, 벽에 즐비한 등반장비는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선생의 산에 대한 열정을 대변해 주고 있다.

부산산악연맹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