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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쪽 무릎 위에 놓인 가야금이 양태숙 씨의 손놀림으로 춤을 춘다. |
- 중1때 입문, 강태홍 씨에 배워
- 박귀희 선생에 15년간 사사
- 전수자 돼 후학 양성 매진
- 해오름전통예술단 창단
- 딸도 서울대 국악과 출신
가야금병창은 단가나 판소리 중의 어떤 대목을 따로 떼 가야금으로 반주하며 부르는 것으로 판소리에서는 '석화제'라 부르기도 한다. 조선 말기부터 불리기 시작하였으며 순조 때의 명창 김제철, 신만엽 등이 처음 도입하였다 한다. 196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어 박귀희 명인에 의해 전승되어 오고 있다.
부산 부산진구청 앞 부광빌딩 옥상 소리방에서 제자들을 지도하고 있는 양태숙(58) 씨를 찾았다. 당대 가야금병창 최고 명인 박귀희 선생에게 15년이나 소리 공부한 덕분에 손으로 유려한 소리의 선율을 짚어가며 한껏 소리의 맛과 멋을 엮어내는 당찬 소리가 배시시 열린 문틈으로 비어져 나온다.
양 씨는 최승희 무용단을 보고 반한 평북 출신 모친 덕분에 6살에 벌써 무용학원에 다니며 춤을 배웠다. 줄줄이 태어난 여동생 셋도 모두 무용학원에 다녔다. 성남초등 6학년 때는 정정숙무용학원으로 옮기고 곧 이매방 선생 문하로 들어간다.
그러다 대신여중 1학년이 되면서 구연우(가야금산조 예능보유자 신명숙의 부군) 선생에게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한다. 선생의 병사 이후 선생의 가야금 스승인 강태홍 선생을 수소문하여 온천장으로 가서 제자를 두지 않겠다는 선생에게 간청하여 성금련류 가야금산조부터 배운다. 부산여상 3학년 때이다. 전국을 유람하던 선생이 부산에 정착하고 있을 때였다(강태홍류 가야금산조는 부산시 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양 씨는 고교 졸업 후 유치원 교사, 동서기 인턴, 중·고생 과외지도 등을 하면서 가야금 교습비를 벌었다. 유치원에서 해마다 치르는 재롱잔치를 기획하고 무용도 가르쳤다. 지도력이 돋보여 재롱잔치를 성공리에 멋지게 마무리했다. 유치원 재롱잔치에서 네 살 위의 부군을 만나 23살에 결혼한다. 시댁에 들어가 시부모를 모셨다. 시부는 가야금 켜는 것을 좋아하여 거나하게 술 취한 날이면 며느리 가야금 솜씨를 듣고 싶어 했으나, 집안일 젖혀두고 가야금만 들고 앉은 모습은 시모에겐 가시였다. 간섭이 심해지고 갈등의 골이 깊어질 때 시부님이 분가를 결정하고, 하던 가야금 공부도 계속하라고 격려해 주었다. 당시 인기 절정인 여성국극단 '햇님달님'의 단장 박귀희 선생을 찾아가 가야금병창을 본격적으로 배워서 완성하라고 하면서 일면식도 없는 선생에게 며느리를 잘 부탁한다는 당부의 편지까지 써서 손에 쥐여주었다. 1978년 상경하여 당시 가야금병창으로 이름난 오갑순 선생을 찾아 박귀희 선생 집 위치를 물어 명창이 운영하는 비원 앞의 운당여관을 찾아갔다. 시부님의 간곡한 글을 본 박귀희 선생이 감격해 하며 막무가내로 부산에서 온 생면부지의 여인을 제자로 받아들여 함께 기거하면서 가야금을 배우도록 허락한다. 그러나 처음 1개월간은 제대로 소리 공부를 하려고 온 사람인지를 확인하는 테스트를 암중에 수시로 했다. 그런데다 안숙선, 강정숙, 윤소인 등 서울의 쟁쟁한 대선배 틈새에서 온갖 시샘 다 받으며 공부한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특히 결혼하여 가정이 딸린 여성으로서 모든 일에 본을 보여야 했기에 어려움은 더 컸다.
매주 수요일이면 상경하여 소리 공부하고 토요일 밤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15년간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다니며 공부에 매진하였다. 가야금 연주는 잘해도 소리가 따라주지 못하면 헛공부였다. 더구나 경상도 발음의 교정은 너무 어려웠다. 밤잠을 설치면서 홀로 연습하고 익혔다.
시부모에게 부탁하고 온 어린 것들도 눈에 선하고 자신의 공부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시모의 눈길도 매서웠지만, 무엇보다 부군의 병환이 걱정이었다. 수술 후유증으로 투병 생활하는 모습이 눈에 밟혔다. 당장에라도 그만두고 싶었다. 하지만 어렵게 시작한 소리 공부가 아니던가. 스승이 건강할 때까지만이라도 열심히 배워야 자기로 인한 모든 부족함을 감싸 안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시부님이 그간의 생활비는 물론 심지어 교통비와 서울에서의 교습비 일체를 말없이 챙겨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서울 가면 스승님의 무서운 소리 채찍이 기다리고 있고, 부산 오면 그간 미뤄두었던 일 구덩이에 빠져야 했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지만 시부님의 말 없는 격려가 이런 고됨을 잊게 해 주었다.
그렇게 10년이 되었을 때 가야금병창 전수자가 된다. 그리고 배운 소리를 복습할 겸 지도해온 4살 된 딸(정경화)을 스승 앞에 보여 소리를 들려주었다. 딸을 통해 절대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음을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됐어, 됐어. 이젠 눈 감아도 한이 없겠어. 제대로 가르쳤구먼." 스승의 칭찬이 떨어졌다. 이젠 딸을 위해 판소리를 익혀야 했다. 짬짬이 틈을 내어 성우향, 조상현, 박계향 선생을 찾아다니며 소리 공부를 했다. 그렇게 서울 생활 15년이 되던 1993년 9월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 스승 박귀희 선생이 타계한다. 임종도 하고 상주로서 대전국립묘원까지 동행했다. 스승 사후 제자들의 파벌 갈등은 골이 깊어졌다. 스승은 그것을 미리 알고 있은던 듯 이해 7월 1일 양태숙 씨에게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을 10년간 교육 수료하였음'을 증명하는 수료증을 스승의 이름으로 주었다. 양 씨는 그간 가야금은 구연옥, 강태홍, 박귀희 스승으로부터 전수받고 판소리는 박계향, 성우향, 조상현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았다.
어릴 때부터 영특함을 보였던 딸 경화는 48대 1의 경쟁을 뚫고 판소리로 서울대에 입학하여 국악과를 졸업하고, 2001년 전국판소리명창대회에서 일반부 대상을 받는 등 소리 공부가 뛰어났다. 이젠 결혼하여 필리핀에서 살고 있지만, 그곳에 우리 소리를 심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1999년부터 본격적으로 가야금병창 전수소를 열어 후학을 가르치면서 이젠 후회도 없다. 둘째 동생 태순(55) 씨와 태실(48) 씨도 춤에 일가를 이루었다. 1992년부터 10년간 해오름전통예술단을 창단하여 동생들과 합동으로 매년 가무악공연도 하였으며 부군과 딸 아들이 함께한 가족 사물놀이 발표도 하였다. 우리 음악을 얘기하는데 거칠 것 없는 양태숙 씨의 가야금병창이 더 돋보이는 이유이다.
지난해 정초부터 연재하기 시작한 '부산을 지키는 꾼·쟁이들'은 전통예술에 바탕을 둔 이들로부터 시작하여 제도권 밖에 하찮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이들까지 수록하였다. 물론 아직도 필자가 미처 만나보지 못한 꾼·쟁이가 주변에 많을 것이다.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숙제로 미루고 이야기를 접는다. 다양한 삶을 살아온 꾼·쟁이들이 메마른 우리 삶의 윤활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글을 썼다.
010-3558-5938 부산민학회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