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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맨티스트 가객 최대호 씨가 부산 동구장애인복지관에서 열창하고 있다. |
- 학창시절 밴드 보컬로 활약
- 음악실 DJ… 낙동강을 노래
- 자기이름 걸고 콘서트 개최
- 크로스오버 음악 즐겨 불러
노래를 부를 줄 안다는 것, 하나의 악기를 연주할 줄 안다는 것은 새로운 언어 하나를 더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는 '태백' 편에서 '시에서 감흥을 일으키고, 예에서 사람답게 세상에 서며, 음악에서 성정을 완성한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했으니, 언어인 시로 출발하여 음악에서 인격이 완성된다는 말이렷다. 공자는 유독 음악을 좋아하여 제나라에서 순임금 시절의 음악인 소(韶)를 듣고는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잃을 정도였단다.
지난 1월 세밑, 원도심 산복도로의 동구장애인복지관 강당은 이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 가객 최대호(60) 씨의 노래로 열광하고 있었다. '빛과 그림자', '사랑은 나의 행복' 등의 구수한 노랫말이 최대호 특유의 두껍고 맑으면서 다소 쉰 듯한 음색으로 관중을 사로잡는다. 노래따라 손뼉 치고 불편한 몸을 흔들면서 즐거워한다. 1970년대 향수로 되돌아간 듯하다. 굳이 몸집보다 큰 미군 야전 점퍼를 고집하며 TV를 주름잡던 조영남과 타이거 리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톰 존슨이 번갈아가며 '딜라일라'를 불러대던 시절로 말이다.
번쩍거리는 의상은커녕 허름해 보이기까지 하는 수수한 옷차림에 덥수룩한 수염으로 꾸밈없이 노래 부르는 모습에서 잊어버렸던 '우리들의 초상'을 보는 듯하다. 대중가요의 음악성이 클래식 수준을 능가하는 이른바 크로스오버류의 음악을 즐겨 부르는 최대호다운 스타일이다. 그래서 그의 노래는 잘 갖추어진 음악회에서보다 음악다방이나 카페, 주촌에서 들을 때 더욱 정겹다. 좋은 음악과 노래는 세상에 지치고 멍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잠시 잊고 있던 높고 높은 세계로 다시 이끌어준다 하지 않던가.
최대호 씨는 젊은 시절 정치를 쫓아 경주에서 부산으로 온 경주최씨 3대 독자 아버지의 2남 막내로 태어났다. 화랑초등학교와 서중학교를 졸업하고 경남고 2학년 시절 당시 배정고등학교 그룹사운드 '사파이어'의 보컬로 활약한다. 이젠 고인이 된 동갑내기 홍성모와 어울려 가발 쓰고 음악다방에서도 노래하였다. 창선동 황금다방과 광복동 무아 음악실에서는 가수 최백호 등과도 노래했다.
1974년 대학을 재수하면서는 하단의 에덴공원 '강변' 음악실에서 DJ를 보았다(그는 이때의 사진 자료를 많이 소장하고 있다). 그리고 갈대밭과 낙동강이 어우러진 을숙도의 낭만을 노래했다. 이런 그리움은 낙동강에서부터 비롯되었기에 낙동강이란 말만 들어도 향수에 젖고 낭만으로 가슴이 저며왔다. 환경운동가 김상화 씨와 낙동강 생태환경을 답사하면서 낙동강 속살을 피부로 느껴 보았으며, 이즈음 홍성모와 함께 YMCA에서 기타를 가르치고 있던 MBC 대학가요제(제2회)에서 대상을 받은 작곡가 박철홍 씨를 만나게 된다.
홍성모와는 고교 1학년 때부터 음악으로 교분을 트면서 그가 저세상 사람이 될 때까지 곁에 있었다. 그가 MBC 대학가요제에서 보컬로 특별상을 받은 후 전공했던 그림도, 좋아하던 노래도 팽개치고 연극에 빠졌을 때도 함께였다. 최대호 씨도 잠수함을 타듯 음악을 떠났다. 2000년 긴 휴면에서 깨어나 다시 음악을 시작했다. 여러 음악회에 게스트로 참여하고 라디오 방송매체에서도 활약했다. 2002년 최대호의 이름을 붙인 제1회 콘서트를 열었다. 시인 정계화의 시에 김인효가 곡을 붙인 그의 대표곡 'In my memory(내 기억 속에는)'를 발표한다. 제2회 콘서트는 2004년 을숙도 야외무대에서였다. 을숙도와 낙동강의 추억과 낭만을 풀어낸 '낙동강 2'를 타이틀 곡으로 수록하면서이다.
"아! 내 민족아 눈을 뜨라. 아! 내 겨레여 눈을 뜨라. 하늘 저 높이 철새처럼 훨훨 날면서 크게 눈을 뜨라…." 동아대 박철홍 교수가 30년 전에 써 둔 곡이었다. 낙동강을 노래한 곡들이야 숱하게 들 수 있지만, 그가 기타반주로 조용히 읊조리며 들려주는 '낙동강 2'는 1970, 1980년대의 감성이 흘러넘치며 당시 청년문화의 대중을 이루던 음 빛깔이 묻어나오는 노래였다. 학창시절 그저 노래가 좋아서 또래들과 어울리고 출렁이던 노래가 한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맥놀이를 이루면서 노래 속으로 감성이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예전 같지 않게 음악적 소양이 높아진 대중 앞에서 가수의 자기 성찰은 기본일 수밖에 없다. 관객과의 소통을 위한 가수로서의 '보임'은 기타를 치고 노래만 불러서 될 일이 아니었다. 내 음악에 대한 분명한 해석이 있어야 했고 나만의 빛깔이 있어야 했다. 그러기에 그 시절 찻집에서, 주점에서 교류했던 문인들과 화가, 연극인, 음악인들과의 만남은 그에게 양질의 자양분이 되었다. 숨 고르고 링 위에 버텨선 선수랄까. 그는 데뷔하자마자 오케스트라와 협연도 불사했으며 기성 가수들과도 함께 무대에 섰다. 그리고 그만의 빛깔로 노래를 불렀다. 이른바 그칠 것이 없었다. 지난해 12월 동아대 다우홀에서의 여덟 번째 콘서트는 실버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지칠 줄 모르는 또 다른 열정으로 관객에게 다가서서 교감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가수협회 등 제도권 안에서의 활동을 애써 피해온 최대호 씨는 생활수단으로서의 전업가수도 지양한다. 노래가 좋아서 '노래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의 노래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 곁에 항상 있고 싶어한다. 막걸리 한 잔 간절히 생각나는 걸쭉한 노래로 삶에 지쳐 움츠러든 이 시대의 영웅들을 위하여 더 크고 넉넉한 울림으로 우리 곁에 다가오는 최대호 씨의 노래가 그리운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010-2571-0505 부산민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