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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설이굿 무복과 무구를 갖춘 황순연 각설이무당이 신당 앞에 섰다. |
- 부군의 방랑벽에 생활고
- 신 내림 받고 제2의 인생
- 10년 후엔 각설이신까지
- 자식에겐 미안한 마음만
지금도 '무(巫)'에 대한 편견은 심하다. '무언가 귀신스럽고 저질스러운 미신'이라는 고질적인 오해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무는 초월적 존재로서의 신령과 조상을 믿으며, 단골을 신도로 두고, 그 둘 사이에 사제로서 무당이 있어 갖가지 종교의례를 통하여 그들을 중재한다. 그러므로 무는 미상불 종교라 해야 옳다.
한자를 분류한 '설문해자(設文解字)'는 무를 '여자로서 형태 없는 것을 섬기고 춤을 추어 신을 내리게 하는 자'라 풀이한다. 이른바 '하늘과 땅을 잇는 기둥 양옆에 사람이 춤추는 꼴'이 '무'자이다. 기둥은 신목(우주목)이 되고 춤추는 이가 바로 무당이다. 그렇게 보면 무는 무당이 굿하는 장면을 떠올리는 글자로서 종교현상을 설명해 주는 적절한 용어가 된다(무당이란 용어는 '여자 무'를 지칭하고 '남자 무'는 박수라 칭한다).
그러므로 무당은 굿이라는 무의 종교의례를 집전하는 사제이다. 단골(신도)은 신당에서 맞이하고 무꾸리를 하는 곳도 신당이다. 다른 종교의 사제와는 달리 무당은 특히 굿에서 신 내림의 체험을 전문으로 하는 특수한 사제이다.
그러므로 단골들은 그들의 사제를 찾아와 모든 큰일을 상의하여 처리한다. 굿 가운데는 병굿이 있고 그것을 약식으로 치성의 규모로 거행하면 푸닥거리가 된다.
'국조의례' 등으로 나랏법이 엄격하였던 조선의 세종과 세조·중종 때도 무당이 오늘날의 보건소에 해당하는 활인서에 소속되어 주로 전염병의 치료를 담당하기도 하였다(이능화의 '조선무속고').
각설이 신을 받아 영험하다고 소문난 '각설이무당' 황순연(52) 씨의 범내골 신당을 찾았다. 이 층 계단을 오르니 신당과 마주한다. 천수천안관음보살을 주불로 모시고 왼쪽에 대신할매, 오른쪽에는 하얀머리에 도사복장을 하고 지팡이 짚은 도인도사를 모셨다. 그리고 산신할매와 용왕할배까지 모셨으면서도 조촐해 보이는 신당이다.
황 무당은 경남의 옛 마산시 진동 대티리가 고향으로 5남 1녀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오빠 넷과 남동생 틈새에서 귀여움을 받지만 선머슴과 같은 개구쟁이 소녀로 자랐다. 소녀의 다소곳함보다 주관이 강하고 강직하여 매사에 거칠 것 없이 자랐다. 그래서 어릴 때 별명이 골목대장이었다. 나물 캐러 가서도 사내들이 치근덕거리면 팔 걷어 부치고 혼내 주었다. 그런가 하면 동네 아기들 업고 어르고 봐주는 일과 기저귀 빨래랑 궂은일에도 팔 걷고 나섰다. 10살 때 당산나무 밑 가파른 언덕바지에서 떨어졌어도 다치지 않았다. 당산 할매의 보살핌이라 여겼다. 고향의 초등학교에 다녔다. 12살 때 신병으로 고생하던 어머니를 여의고 마산의 큰오빠 집으로 가서 의신여중을 졸업한다. 1년 후 고등학교 진학 욕심으로 오빠 몰래 부산으로 와서 당감동 이모 집에서 기거하며 문현동 문현여상을 졸업한다. 재학동안 개근상과 모범상을 받았다. 왈가닥 소녀가 일약 모범생이 되었다.
1980년 졸업 후 학교장 추천으로 부라더미싱의 무역 부서에 취업하였다. 이모댁에서 독립하여 학교에서처럼 성실 근면하게 근무했다. 한 직장에서 9년간 근속 근무하면서 지각·결근은 없었고 시내버스를 타고 일찍 출근했다. 20살 때 불교와 인연을 맺어 강원도 홍연암으로, 신흥사, 설악산 적멸보궁 등을 찾아 부처님 공부를 열심히 했다. 해인사 백련암에서는 성철 스님을 만나 3000배도 드렸다. 불교 공부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보람찬 공부였다. 마음을 다스리고 참진실을 깨우치는 공부였다. 하루라도 경전을 읽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았다. 출가를 생각하기도 했지만 마음공부로 다잡았다. 29살 되던 해에 직장을 그만두고 불교청년회에서 만난 8살 터울의 도반과 결혼한다. 영도에서 아들 삼 형제를 두고 오손도손 살았다.
결혼 10년 즈음 부군의 방랑벽이 나타났다. 객지로 나다녀야만 마음이 편한 역마 직성이었다. 시어머니도 신당 모시는 신의 사제여서 부군의 조짐을 몰랐을 뿐이었다. 부군은 엿판을 마련하고 여자 각설이 엿장수로 분장하여 전국을 유람하였다. 가정은 파탄되고 재산도 바닥이 났다. 6평짜리 셋방으로 옮기고 폐지, 신문지를 수집하여 팔아 생활하였다. 겨울에도 냉방에서 잤다. 비참한 환경의 연속이었다.
답답한 마음 달랠 길 없어 친구와 함께 점집을 찾았다. 대뜸 신이 왔으니 신 받으란다. 다른 점집에서도 똑같은 점괘가 나왔다. 자녀들이 걱정이었다. 한 달을 버티다가 신어미와 함께 함안 여항산으로 신 내림 받으러 갔다. 신 받음 산으로 여항산을 택한 것은 고향 진동면 대티리의 뒷산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올곧지 못한 신 어미로 마음고생만 하고 팔도명산 기도 다녀와서 용하다는 법사의 도움으로 신 가르마를 하여 신당을 바로 모신다. 법사가 신 부모 역할을 하며 무당으로의 길을 닦게 해주었다. 노래(巫歌)와 춤, 악기, 의상, 제상 차림, 부적, 점복 등 신 내림을 받은 무당이 갖추어야 할 여러 가지를 익히는 것은 무당의 기본이다. 조상대감신과 천황장군신을 받았다.
10년 후엔 특이하게도 각설이 신이 추가하여 몸 신으로 들어온다. 부군이 여자 각설이로 분장하여 각지를 떠돌았다면, 황 무당에게는 남자 각설이신이 내린 것이다. 산지사방의 각설이타령을 읊고 노래 부르며 각설이 춤을 추었다.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춤이기에 굿을 마치면 무릎과 허리가 아팠다. 평소 술·담배와 어울려 노는 것을 멀리해 온 황 무당이기에 새로운 경험이다. 그래서 황 무당의 각설이 굿에는 노래 잘하는 장구재비가 꼭 함께 해야 한다.
29살에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도 꾸렸다. 그러나 유랑벽으로 각설이 엿장수가 되어 전국을 떠도는 부군 탓에 아이들 양육과 살림을 떠맡아 신고도 컸었다. 피치 못한 신 내림으로 무교의 길에 들어선 지 10년 후에 각설이 신을 몸 신으로 받으면서 각설이 무당으로 불려 왔다. 신의 효험이 커 공수(무당 입을 빌려 인간에게 전하는 신의 소리)를 내리면 단골들의 아픔이 치유된다고 소문이 나면서 형편도 펴지고 넓은 집으로 옮겼다.
어머니의 굿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 어머니의 특별한 삶을 이해하고 더러는 도움을 주기도 하여 무엇보다 고맙다. 이젠 한 달에 열 번은 굿당을 펼칠 만큼 바빠졌다. 그럴수록 마음을 닦는 공부를 열심히 하며 이웃봉사에 몸을 아끼지 않으려는 각오로 오늘도 신당에 좌정한다.
010-9305-5474 부산민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