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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내마을 지킴이 이창호 씨가 태극도인들의 감천마을 입주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
- 재봉틀 들고와 43년째 생활
- 70년대 맞춤복 전성기 열어
- 빈집 리모델링 미술품 설치
- 화장실 수세식으로 교체 등
- 문화마을 재생사업에 앞장
지난해 12월 마지막 금요일. 다시 찾아온 한파로 세상이 꽁꽁 얼어 있을 때 감천마을은 관광객으로 활기찼다. 연인들이 조형물 앞에서 폼을 잡고 작은 박물관에는 마을이 변해온 모습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는 이들이 넘쳤다.
마을 입구 옷 수선 가게엔 시내로 일 보러 가는 주민이 맡겨둔 열쇠 꾸러미가 주렁주렁 달렸고 재봉틀 앞에는 주문받은 옷을 수리하는 가게 주인 이창호 씨의 손길이 바쁘다. 1970년 결혼 후 감천(감내)마을에 정착하여 맞춤복 전성기를 열었으니 벌써 43년째 감천에 사는 것이다. 1980년부터 66세 되는 2011년까지 통장(16통)도 맡았다.
감천2동은 입지가 산비탈이어서 삶 터를 이루기에는 부적합한 곳이었다. 이곳에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찾아들어 움막을 이루고 살던 것이 해방 후에는 그 수가 늘어 판잣집과 초가집이 40여 채에 이르렀던 한적한 빈촌이었다. 그러던 마을이 태극도인들로 넘쳐나게 되었다. 반달고개(감천고개)에서 옥녀봉 쪽으로 집터를 1~4감 계단식으로 나누고 중앙지대를 본부인 5감으로 하였다. 본부 남단에서 천마산 자락을 따라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6~9감으로 정해 고향 별로 입주하게 하였다. 한때(1985) 인구가 2만6000명에 이르기도 했다.
태극도는 함안사람 조정산(조철제)이 무극의 진리를 창도하면서 무극태도라 부르다가 1948년 본부를 보수동으로 옮기면서 '태극도'라 바꾼다. 그리고 1955년 7월 도주 조정산의 지시에 따라 감천으로 이주한다. 옮겨온 집들은 판잣집 일색이었다. 1977년이면 판자와 루핑집 일색이던 마을집들이 블록으로 벽체를 쌓고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뀐다. 그리고 비 새는 슬레이트를 걷어내고 패널 지붕을 얹거나 아예 슬래브 지붕에 2층을 증축하기도 하였다. 모두 무허가였다.
대전이 고향인 이창호(69) 씨가 부산에 온 것은 중학교 1학년 때 백부를 따라서이다. 7남매 중 셋째로 가난을 피해 사촌들이 사는 남부민동에 정착하여 어릴 때 직업전선에 뛰어든다. 재단 일부터 배웠다. 학생복 만드는 공장에 다니며 물건을 떼어다 부산진시장에 도매로 넘기기도 하였다. 군 제대 후엔 아미동 재봉공장에 취업하였다. 점퍼와 바지 등을 국제시장에 납품하였다. 그러던 중 회사가 부도를 맞을 때 직물공장에 다니던 부인의 권유로 재봉틀 하나 들고 처가가 있는 감천마을에 왔다.
당시 감천마을은 태극도인으로 넘쳐났고 아침이면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도시락 싸들고 시내로 출근하는 인파로 가게 앞길을 메울 정도였다. 맞춤복 가게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이르면서 인구가 줄기 시작한다. 직장 따라 퇴거하고 결혼하면 마을을 떠났다. 태극도가 분리되면서 서울 대순진리교로 많이 빠져나갔다. 가난에 찌든 마을에서 떠나는 것이 살길이라 생각한 젊은이들도 마을을 등졌다. 2009년에는 1만541명(4324가구)으로 줄어들었다. 주로 건축일을 하거나 유사한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이 출근한 오후의 동네는 조용하기까지 하였다. 이 씨 가게도 맞춤복 제작에서 옷 수리점으로 바꾸었다. 도로 확장 후 2008년 지금 장소로 이전하였다.
35살 때부터 맡기 시작한 통장 일은 정년을 넘기고도 계속되었기에 이창호 씨의 마을 사랑은 남다르다. 정들면 고향이라고 이젠 감천 사람이 되었다. 이웃집 숟가락이 몇 개이고 밥 먹을 때 반찬 가짓수가 몇 개인지 알 정도이다. 통장 31년은 결코 허투루 산 것이 아니었다. 한창 새마을사업을 할 때부터였으니 마을 일은 바로 고된 '노가다' 일 투성이었고, 이 씨는 마을 사람과 억척스레 해내었다.
희망이 보이지 않던 마을에 새로운 기운이 밀려왔다. 2009년 '아트팩토리 인 다대포' 젊은이들과 함께 문화관광부에 제출한 마을 프로젝트 '꿈꾸는 부산의 마추픽추' 사업이 당선된 것이다. 주민대표와 작가대표 12명이 추진한 프로젝트는 재개발을 갈망하던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이창호 씨가 발 벗고 나섰다. 작가들이 만든 10점의 조형물을 도로변에 설치하기로 하였다. 이를 경험 삼아 2010년 2월에 감천동 문화마을 만들기 운동을 펼친다. 콘텐츠관광협력사업 공모에 '미로미로 골목길'이 당선되었다. 6개의 빈집과 골목길 사업이어서 전년의 길섶 미술로(路)와는 달리 작품들이 마을 안으로 들여와야됐기에 주민과 더 많이 소통해야 했다. 빈집을 리모델링해 하늘마루, 빛의 집, 평화의 집 등 작품이 있는 집들을 만들었다. 영문도 모르던 마을 사람들의 표정이 밝게 변하기 시작했다. 뭔가 마을이 바뀌어 가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사람들이 기웃거리고 우리가 도울 일이 없느냐란다.
골목길 프로젝트 후 우선 마을이 깨끗해졌다. 공중화장실도 수세식으로 바꾸었다. 골목계단 길에 난간이 설치되고 빈집을 쉼터로 개조했다. 올해는 개인 집 화장실도 점차 수세식으로 바뀐단다. 벌써 이를 위해 공동정화조도 묻었다.
별 볼일 없이 널브러져 있던 비탈진 골짜기 감천태극도마을이 문화마을로 재생되자 소문이 나면서 전국에서 사람이 몰려들었다. 도시연구자들이 사례조사를 나오고 지자체들이 견학을 왔다. 주말이면 가족과 연인들로, 학생들로 넘쳐난다. 중국과 대만, 홍콩에서도 날아왔다. 마을협의회에 신청해 마을을 방문한 단체에는 마을 속내를 안내해 준다. 마을 해설사들이 있지만 그래도 감천 지킴이 이창호 씨에게서 듣는 마을 이야기가 가장 알차다. 지금껏 프로젝트를 진행해온 당사자임에 말해 무엇하겠는가.
제대로 갖춘 가게 하나 없던 마을에 카페가 일곱 개나 생겼다. 마을에서 운영하는 '감내카페' 외에 타지에서 들어온 사람도 저마다 점포를 내고 관광객 끌기에 나섰다. 그래도 감내카페 운영에서 올린 수익은 마을을 위해 쓴다. 지난 겨울 독거노인을 위해 김치 400통을 담그는 등 주민을 위해 쓴다. 비싼 돈 내고 얻은 가게로 무엇을 하던 간섭할 일은 아니지만 마을 자생력을 키워보려는 주민 노력을 외면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이 씨의 당부가 간절하다.
감내마을 지킴이 이 씨는 마을을 찾아오는 이들이 반갑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감내마을 정서만큼은 이해해주길 바란다고 얘기한다. 열악한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으로 이제 막 기지개를 켜는 마을인데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오갈 데 없는 독거노인 등으로 속내를 죄다 보이기에는 마을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 부분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흥지는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라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010-5147-9840 부산민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