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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선교박물관 안대영 관장이 기독교 관련 고문서를 살펴보고 있다. |
- 음악교사 근무하며 자료 수집
- 60년 전부터 모은 5000여 점
- 동래 중앙교회 별관에 전시
- 130여 년 교회역사 한눈에
부산 동래구 수안동에 가면 국내에서 단 하나뿐인 박물관이 있다.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인근의 중앙교회 별관 3층 200여 평에 마련된 기독교선교박물관(이하 박물관)이다. 지난해 10월에 개관한 박물관에는 1832년 독일 선교사 귀츨라프가 최초로 한반도에 상륙한 후 미북장로교 앨런 의료선교사가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폈던 1884년 이후 지금까지 130여 년간의 교회사를 정리해 두었으며, 120여 년 전의 고성서를 비롯해 관장 안대영 장로가 평생을 두고 수집한 5000여 점의 유물과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이뿐 아니라 1911년 주기철 목사 약혼 사진과 외국인학교에서 사용하던 메혜란 성경, 한국 최초의 컴퓨터, 호적변천사, 순명황후 국장장례식 사진첩(1904), 한문신약성경주석 완질본 1~4권(1916), 유일본인 1911~1924년 서울노회 회의록, 1905년 멕시코에 처음 이민 간 석상근의 여권도 있다.
한국관의 중앙기둥 11면에는 장로교·감리교·성결교·복음교회·그리스도의 교회·구세군·성공회·루터교·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교회, 정교회, 침례교 등 한국기독교가 전래해 정착한 11개 교파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두었다. 이외에도 별실에는 지역사회관(6평, 400여 점)과 한국민속관(6평, 300여 점)도 갖추었다. 특히 오경봉 교장(철마초등 퇴임)과 평교사 김해영 교사의 일제강점기부터 사령장과 교사기록, 증서 그리고 상장, 통지표 등의 근대 교육자료가 수집, 보존되어 있어서 공교육의 발전해온 모습을 볼 수 있게 하였다.
안대영(78) 관장은 기장군 철마면, 당시만 해도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2남 3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농군 아버지를 닮아 부지런하여 초등학교 졸업 후 장작을 패어다 소달구지에 싣고 부산으로 팔러 다녔다. 새벽 닭소리와 함께 온천장으로, 동래, 서면, 그곳에서도 팔리지 않으면 멀리 영도까지 갔다.
하루 백 리, 이백 리 길이나 되는 먼 길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걸어서 다녔다. 그렇게 3년이 지난 어느 날 고향 초등학교에 새로 부임한 여교사가 셋방을 들면서 선생의 권고로 금정중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아들의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본 부친은 1953년 동래로 이사 오게 되었고 동래고를 졸업하고, 국립부산사범대학 음악과에 진학하여 중등학교 음악교사가 되었다(1961). 그러나 정작 하고 싶은 공부는 사학이었기에 선배로부터 빌린 기장향토지를 시작으로 향토사와 사학 관계 도서를 무작위로 독파하여 내공을 쌓았다.
지역사부터 공부해야겠다는 필생의 각오로 박봉을 쪼개어 교회사를 찾아다니고 유물과 자료들을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서울 인사동 거리를 훑고 다녔으며 자료소장 정보를 얻으면 한걸음에 달려가서 손에 넣었다. 서울 딸네 집에서는 전 주인이 이사 갈 때 지하에 두고 간 양주 수십 병을 발견하고 슈퍼에 내다 팔아 인사동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어느 해 부친 동향인 김영선 장로댁을 방문했다가, 고물상에 팔려고 사랑방에 쌓아둔 책들(주로 교회관계 자료)을 보고 주인을 설득하여 사기도 했다. 다섯 보따리나 되는 100여 권의 책은 선교와 관계되는 귀중한 책으로 사료가치가 높은 것들이어서 솟구치는 흥분으로 잠을 설치기도 했다. 사실 많은 아까운 자료가 사랑방 벽장이나 창고에서 잠자다가 이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는 집주인들에 의해 엿장수나 고물상으로 팔려나가 폐휴지장으로 가기 일쑤였다.
일명 화중지성경(火中之聖經)이라고 부르는 '불에 탄 천로역정'에는 김민수 조사의 얘기가 함께 전한다. 설날 아침 그날도 무심코 교회에 가려고 집을 나서는 걸 본 부친이 "이놈아, 지 애비 제삿날에 찬물 한 그릇 안 떠 놓고, 갯가 뱃놈부터 만나러 가다니" 하며 성경 보따리를 빼앗아 소죽 끓이는 부엌에 던져 넣고 "니놈 때문에 우리 집 망한다. 이놈의 집 부셔 버리야겠다"며 톱으로 집 기둥을 켜는 사이, 불 속에 던져진 보따리의 책을 황급히 끄집어낼 수 있었는데 이 책 보따리에 한강 이남에서는 단 한 권뿐인 '천로역정'이 싸여 있었다. 그림 해설판이 있는 이 책의 한 부분을 박물관 입구에 동판으로 크게 제작하여 포토존으로 만들어 두었다.
벌써 60년 전부터 시작한 안 관장의 자료수집벽(?)은 한 번 손에 들어온 것은 절대 버리지 않고 모아두는 습관이 몸에 배면서이다. 그의 3층 주택방 거실 창고도 유물저장고였으며, 그것도 모자라 옥상에까지 쌓고 큰 독 속에도 넣어 보관해 왔다. 안 관장은 130년 전 외국선교사로부터 복음선교를 받은 한국교회가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를 모두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박물관 개관은 '모음'에서 '펴놓음'으로 환원하는 것이었기에 큰 의의가 있다. 초창기 한국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는지, 기독교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서 미래를 쳐다볼 수 있는 의미에서라도 박물관 설립은 꼭 필요한 것이었다.
2009년 동래중앙교회가 별관 신축을 완료하고 그 기념으로 3년 가까이 안 관장이 소장하고 있던 유물과 자료를 전시하게 되었다. 안 관장은 이를 계기로 한국기독교 선교박물관 설립을 당회(교회의 의결기구)에 조심스레 건의하게 되었다. 당회장(정성훈 목사) 등 여러분도 뜻을 함께하므로 교회 내에 부설박물관이 설립될 수 있었고, 수장가 안대영 장로에게 박물관 관장까지 위임하게 된 것이다. 안 관장은 모든 자료를 자전거에 실어 교회로 운반하였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수집한 자료들을 필요로 하는 부산박물관(7점)을 비롯하여 철마초등역사관(56점), 내성초등 100주년 역사관(85점), 청룡초등 100주년 역사관(120점) 등 10여 곳에 아낌없이 기증하였다.
가난한 농군 아들로 태어나 음악교사 박봉을 쪼개어 이렇듯 방대한 교회사 관계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신념에 찬 노력도 있었지만, 말없이 부군의 활동을 더러는 모르는 채 내조해 주었던 부인의 숨은 공로가 크다.
1998년 동래고등학교도 100주년 기념으로 역사관을 새롭게 단장하게 되었으며, 2006년에는 동창회에서 35회 졸업생 안대영 씨에게 박물관장을 맡겼다. 그는 오전 6시에 기상하여 모교 역사관 문을 열고 청소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아침 운동으로 테니스를 하고 선교박물관에 출근하면 10시가 된다. 자료를 수집하는 일에서부터 분류하고 전시하며 찾아오는 이들에게 해설해 주는 이 모든 일이 오로지 그의 영글어진 신앙심으로부터였다고 확신하기에 오늘도 그는 고된 줄을 모른다.
010-9208-9576 부산민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