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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농악 상쇠 보유자 후보 강신일 씨가 꽹과리 연습에 열중해 있다. |
- 중학교 시절부터 농악 입문
- 당대 대한민국 최초 기능인
- 김한순 선생에게 사사해
- 상쇠로 활약하며 외길인생
- 사명감으로 바른 전승 노력
농악은 '농부들이 두레를 짜서 일할 때 치는 음악'이란 뜻으로 정리되지만 공식적인 용어사용은 1937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된 '부락제'(지금의 당산제, 동제)에서 처음 기록된다. 우리 민족 음악을 무시하고 비하하려는 일제의 문화정책에 의해서이지만 우리는 예로부터 굿·매구·풍장·풍물·금고·취군 등으로 불러왔다.
마을마다 풍물패가 있어서 마을굿을 이끌었고, 정초면 마을의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의례인 마당밟기를 해왔다. 두레를 짜서 모심고 논맬 때도 농기와 두레기를 앞세우고 풍물을 잡혔다. 그리고 마당굿을 벌일 때면 풍물패의 기예를 총동원하여 판굿을 짰다.
부산농악은 서구 아미동을 중심으로 전승되는 풍물굿이다. 해방 후 대신동의 유삼룡을 단장으로 한 15명 내외의 '고분도리농악단'이 그 시원이 되지만 곧 해체되고 만다. 1953년 아미동 이명철을 단장으로 이들을 규합하여 '아미농악'을 재출범해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1971년부터 김한순(사망)이 단장을 맡으면서 1980년 부산시 지정 무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받기에 이른다.
부산농악은 다른 지역 농악에 비해 느린 4박자의 굿거리장단이 많이 사용되고 춤도 많은 것이 특징이다. 농사풀이와 들벅구놀이도 독특하며 그 세련미가 뛰어나다.
중학교 1학년, 14살 때부터 부산농악을 배워 놀이판을 휘몰아가는 부산농악 으뜸 상쇠 강신일(48)씨의 학장동 연습실을 찾았다. 강 씨의 부친은 6·25전쟁 때 가족과 함께 피란 와서 암남동에 정착하고 결혼한다. 슬하에 4녀 1남을 두었는데 강씨는 넷째다. 송도초등학교 졸업 후 송도중에 입학한다. 그해 부산농악전수학교로 지정되어 전교생을 대상으로 농악부를 신설할 때 1학년생으로 농악부에 뽑힌다. 키는 작아도 동작이 재빨라 다른 아이들보다 빨리 익혀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소년은 예능보유자 김한순 선생에게 집중지도를 받았다. 풍물 배우는 것이 자랑스러워 하교할 때도 풍물단 복장으로 하굣길을 누볐다.
어린이날이면 구덕운동장에서 부산역까지 시가행진하면서 항상 대열 앞에서 형들과 뽐내며 상모 돌리고 소고 치는 것이 신이 났다. 연예인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꽹과리·징·북·장구를 골고루 익혔다. 중3 때 송도중 전수학교가 폐지되고 송도상고가 지정을 받게 되었다. 덩치가 큰 고교생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좋아서 시작한 일 끝장을 봐야 했다. 내친김에 송도상고 특기생(농악)으로 선발되어 진학했다.
고1 때부터 꽹과리를 알기 시작했다. 아미동 언덕배기 대성사에서 살다시피 하며 김한순 선생에게 쇠를 배웠다. 판굿에서의 쇠발림(쇠꾼의 춤)도 배웠다. 물채꼭대기에 짧은 종이를 잇댄 채상모춤을 배웠다. 마당굿 가락을 치면서 잽이들을 둘러 세우고 멋진 쇠발림을 하는 좌우치기, 상하치기, 앉은걸음, 앉아 좌우치기, 발 사이로 손모으기 등을 전수받는다. 학교 마치면 책가방 들고와서 매일 연습했다(전수관이 없는 시기여서 김한순 선생 사비로 운영되었다). 선생과 한가족 같이 지내며 농악 속에 살았다.
"곁눈질하지 말고 부산농악은 물론이고 경상도 가락을 지켜야 한다." 선생의 가르침을 가슴 속에 심고 살았다. 당대 대한민국 최고의 기능인 김한순 선생에게 직접 사사하는 영광으로 가슴 벅찼다. 각 지역의 풍물 이야기를 듣고 사물놀이 창시자 김용배, 김덕수의 어릴 적 이야기로 밤을 하얗게 새기도 했다.
선생의 상쇠놀이는 공연장에서 배우고 익혔다. 작은 체구에서 쇠발림하는 모습이 아주 아름답게만 보였다. 가락과 몸동작, 상모놀이 등 상쇠놀이의 세 가지 기능이 모두 뛰어나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경지여서 흠뻑 빠져들었다. '나도 저렇게 해봤으면' 바람뿐이었다. 드디어 2학년 때부터 상쇠로 활약한다. 당시 부산농악은 김한순 선생을 비롯한 정윤화(북), 엄정섭(징), 김병기(장구), 이성근(상모) 제씨들 중심이어서 송도상고 부산농악팀의 활약이 크게 기대되던 때였다. 80여 명의 대단원으로 부산농악 회원과 더불어 86아시안게임을 시작으로 87전국소년체전, 88올림픽 등의 큰 행사에 동원되었다.
1985년부터 집중 연습한 보람이 있었다. 송도상고의 기량이 돋보이는 시기였다. 1986년 5월 부산민속축제 학생부에서는 경연이 끝난 뒤에 시범종목으로 선택되어 40분 넘게 멋진 부산농악을 시연했다. 모두 숨을 멈추고 이들이 펼치는 풍물굿을 봐주었다. 상쇠 강씨의 기량이 검증받는 순간이었다. 신문에도 대서특필되고 어른들도 '김한순 상쇠'를 빼닮았다고 칭찬해 주었다. 이 시기는 동호여상과 해사고(당시 선원학교) 등도 부산농악전수학교로서 활약이 컸었다.
송도상고를 졸업하고 박칠석(북), 김대원(상모), 이복남(북), 송민재(꽹과리) 등과 함께 부산농악보존회에 입회한다. 다시 채상모 소고부터 시작하여 꽹과리를 맡기까지 한눈 팔지 않고 열심히 활동하였다.
1990년 초 정우수, 김종기 선생과 더불어 시작한 '매구패예술단'으로 부산농악의 풍물세계에 뛰어들었다. 풍물굿을 알리고 보편화시키기 위한 시도였다. 사물놀이로 흥미를 유발해 부산농악이라는 전통음악으로 정착하게끔 길을 열기 위함이었다. 물론 사물놀이가 성황을 이루던 시기여서 풍물굿의 느림과 비움의 미가 생략된 사물놀이는 한국적이어야 한다는 의식마저 없다면 어쩌면 서커스를 닮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었다. 그러나 사물놀이를 지도하는 지도자의 올바른 바탕이 갖추어진다면 한 장르로서의 사물놀이도 전통음악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중학생이란 어린 나이에 또래 아이들보다 일찍 풍물에 입문한 지 벌써 34년. 주위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한길 한우물만 팠다. 논리적이진 못해도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기에 풍물은 생활 그 자체이다. 앞선 어른들이 하는 일, 내가 대를 잊지 않으면 안 되겠다. 후세들에게 제대로 전해주어야겠다는 각오로 살아왔다. 그래서 원광대 디지털대 전통공연예술학과를 수료하는 등 내공도 쌓았다.
훤칠한 키에 사람 좋아 보이지만 쇠만 잡으면 쇠가락에 전신을 몰입시키는 남자, 오직 부산농악의 바른 전승을 위해 고집도 피울 줄 알고 욕심도 버릴 줄 아는 남자, 필자는 이 남자에게 반해 버렸다. 010-5488-5941/
부산민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