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인 한길사 김언호 대표가 최근 자신의 유년기 추억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부산 중구 보수동 책방골목 북카페 '우리글방'에서 책에 얽힌 부산 추억담을 이야기하고 있다. 홍영현 기자 hongyh@kookje.co.kr

- 37년간 출판사 운영한 '책의 장인'
- 경기도 파주 출판도시 탄생 주도

- 부산상고 재학 시절 헌책방 경험
- 인생의 방향 결정한 느낌 받아

- 서울 청계천 헌책방골목 사라져
- 보수동 가치 재발견, 전국 알려야

- 항구도시와 '책의 배' 결합한다면
- 유례 찾기 힘든 도시 이미지 창출

- 청년들 책 읽지 않으면 미래 없어
- 창조적 발상은 독서·토론서 생겨

1980년대 초반 한 정부기관이 민주화 요구에 나선 대학생과 지식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을 분석한 보고서가 회자한 적이 있었다. 순서대로 나열해 보면 1위가 '전환시대의 논리", 2위 '8억인과의 대화'(이상 리영희 저), 3위 '한국 민족주의의 탐구'(송건호 저), 4위 '민족경제론'(박현채 저), 5위 '우상과 이성'(리영희 저) 등의 순이었다. 그런데 이들 책을 낸 출판사를 따져보니 3~5위에 해당하는 세 권을 펴낸 곳이 같은 출판사였다. 바로 한길사. 한길사는 그 외에도 '역사와 더불어 비애와 더불어'(고은), '해방전후사의 인식' 등 시대정신을 탐구하는 책들을 잇달아 펴냈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 초판본,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와 '십자군 이야기' 등에서부터 최근 김명호 교수의 '중국인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한길사의 명저 목록은 끝이 없다.

1976년부터 이 출판사를 설립해 37년째 이끌고 있는 이가 바로 부산에서 고교 시절을 보낸 '책의 장인' 김언호 대표다. 시대의 명저로 평가받은 수백 종을 포함해 3000여 종의 발간 책자 목록만 봐도 그가 단순히 '성공한' 출판업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쟁 이후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지성사를 논할 때 그의 이름이 빠지지 않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김 대표는 경기도 파주의 허허벌판을 10여 년 만에 출판사 200여 곳과 서점 40여 곳이 들어선 전국 최대의 출판도시로 만드는 일을 주도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독서운동 전도사이기도 하다. 현재는 파주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을 겸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최근 부산 사회에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헌책방이 즐비한 보수동 책방골목을 찾아 그 가치에 주목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부산을 아름다운 '책의 도시'로 만들자는 제안과 함께 책의 배 만들기, 파주 북소리 축제와 보수동 책방골목 축제의 결합 등을 주창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부산발 책 읽기 혁명'을 선도하고 있다. 최근 보수동 책방골목을 방문한 그를 만나 책과 보수동, 그리고 부산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었다.


-북카페 우리글방에서 지난달 초부터 사진전 '책-오래된 빛을 찾아서'를 열고 있는데, 왜 보수동인가

▶나는 사진작가가 아니다. 사진전을 여는 이유도 수십 년 동안 찍었던 책과 관련된 사진들을 부산 시민에게 보여줌으로써 책의 가치와 독서에 대한 관심,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책 사랑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다. 사진이 아니라 책이 주제이다. 1975년 동아투위 사태 때 동아일보 기자직에서 해직된 이듬해부터 책과 함께한 인생이지만, 어느 순간 돌이켜보니 1961년부터 1964년 초까지 당시 부산상고를 다니던 시절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보수동 헌책방에서의 경험이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한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6·25 전쟁기에 태동한 보수동 책방골목은 이제 대한민국 최대이자 유일한 헌책방 골목이다. 56곳의 헌책방이 사라지지 않고 60년 이상을 버텨온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서울 청계천의 헌책방골목도 10여 년 전 개발 바람에 휩쓸려 속절없이 사라지지 않았는가. 우리나라 전후 지식사와 정신사의 고향 같은 곳인 보수동은 이제 부산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문화적 긍지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문화유산이자 보배이다. 이곳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새로운 시대를 엶으로써 보수동을 중심으로 부산에 책 읽기 운동이 들불처럼 번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보수동은 잘만 활용된다면 전국적인 명소로 거듭나고 지역 경제에도 부수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한다.

-파주 출판도시 탄생의 산파역을 했는데, 최근에는 '부산 보수동 전도사'로도 알려졌다.

▶서울의 다양한 독서운동가 및 출판문화사업진흥원장 언론 관계자 등 10여 명을 이끌고 보수동을 찾아 부산 문화계와 학계 인사들과 간담회를 한 것도 그들에게 보수동의 오늘을 똑똑히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독서운동뿐 아니라 모든 문화운동이 마찬가지지만, 서울 중심의 활동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특히 내 청소년기의 추억이 숨 쉬고 있고 세상을 보는 눈을 길러준 곳인 보수동을 품은 부산은 너무도 아름다운 도시이다. 여기에다 부산 시민의 '책 사랑'과 행정 당국의 책 문화 장려 정책이 어우러져 명실상부한 '책의 도시'가 된다면 세계적으로도 부러움을 사는 일류 '문화 창조도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틈만 나면 보수동 찬가를 부르고 있다.

-최근 큰 관심을 끈 "부산 앞바다에 '책의 배'를 띄우자"는 아이디어도 그런 차원에서 나온 것인가. 지역 일각에서는 무리라는 주장도 있는데.

▶파주 출판도시와 헤이리 예술마을의 시작도 그랬다. 1990년대의 어느 날 지인들과 북한산 등산을 하던 중에 우연히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한마디 던진 것이 아이디어가 됐고 더 좋은 아이디어들이 보태져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결국 오늘날의 모습을 이루게 된 것이다.

처음부터 융단처럼 깔린 길이 어디 있겠는가. '안 된다'는 생각보다는 '우선 저지르고 보자'는 적극적인 자세가 가장 중요하다. 부산을 넘어 대한민국의 보배인 보수동 책방골목을 더 발전시키고 이곳과 연계해 국내 최대 항구 도시이자 미항인 부산의 지정학적 이점을 십분 활용한 '책의 배'가 결합한다면 전국적인 명물이 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부산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도시의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 그런 생각에서 제안했다. 운영에 들어가는 예산이나 비용을 우려하는 행정기관의 입장도 이해 못 할 바 아니지만, 그 비용을 보충할 아이디어는 무궁무진하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급선무는 '뜻을 세우는 일'이다.

-최근 들어 독서 운동 확산에 더욱 매진하는 듯하다. 책이란, 그리고 독서란 도대체 무엇인가.

▶민주화가 됐다지만, 더 암울한 시대다. 과거에는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책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민주화와 풍요가 이만큼이라도 이뤄졌는데, 지금은 젊은 세대가 책을 읽지 않는 시대가 됐다. 젊은이가 책을 읽지 않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 당장은 표가 나지 않지만 10년, 20년 후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리고 기대 수명의 연장으로 장년층도 끊임없이 책을 읽지 않으면 도태된다. 그래서 책 읽는 나라 만들기에 발 벗고 나섰다.

함석헌 선생께서 '그 시대는 특유의 시대 정신을 가진다'고 하셨다. 책은 바로 그 시대 정신의 총아이다. 그 사회의 모든 정신과 사상, 도덕이 책 속에 있다. 그래서 책은 생명이고 창조의 원천이다. 좋은 책을 읽으면 한 시대와 호흡할 수 있다. 창조적인 발상은 좋은 책을 읽고 생각하고, 토론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새 정부의 3대 국정 지표 중 하나가 '문화융성'인데, 그것은 창조적 상상력이 넘칠 때 가능하다. 그 토대가 바로 독서다. 그리고 모든 새 책은 헌 책이 되기 마련이다. 헌 책은 결코 지나간 것, 낡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보수동이 더욱 소중한 것이다. 가능하다면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최근 전국 최초로 결성된 가칭 '보수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관심이 간다.

▶보수동 책방 주인분들의 가려운 부분을 풀어나가기 위한 첫걸음이다. 정식 조직을 갖추는 데는 약간 시간이 걸릴 수도 있겠지만, 이제 시작이다. 모든 것은 시작이 중요한 것 아닌가. 우선 서울과 파주 등에서도 회원 확보를 위한 노력을 기울일 예정이다. 그리고 민간 차원의 조직이지만, 보수동의 발전과 부산의 책 읽기 문화 확산, 나아가 전국적인 책 읽기 운동 전파의 구심체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부산의 문화계 및 보수동 사람들과 지혜를 모아나가겠다.


※프로필

▷경남 밀양 출생(1945) ▷부산상업고등학교 졸업(1964) ▷중앙대학교 신문학과, 서울대학교 대학원 언론정보학과 ▷동아일보 기자(1968~1975) ▷한길사 대표(1976~ ) ▷파주 예술마을 헤이리 이사장(1997 ~ 2005) ▷도서출판 한길아트 대표( 1998년 ~ ) ▷동아시아출판인회의 의장(2008 ~ 2011) ▷파주북소리 페스티벌 조직위원장(2011~ )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2013~ )

◆지은 책 : 책의 탄생 1, 2(1997), 헤이리 꿈꾸는 풍경(2009), 한 권의 책을 위하여(2012), 책의 공화국에서(2013)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