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양소년, 등잔불 밑서 공부

- 가세 기울며 붓 놓았었지만

- 30세 때 지리산 유람하면서

-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 만들어

- '다른세상의 그림' 평 받기도

부산 사하구 당리동 허휘 선생의 40여 평 화실에는 부산 100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벌써 20년 넘게 부산의 풍경을 화폭에 담아오고 있는 한국화가 허휘(許翬·67) 선생. 그는 1990년 부산항 그림을 시작으로 100경을 그려 보자고 작정했으나 곳곳의 풍경에 따라 어떻게 표현기법을 달리하여 그릴 것인가로 고민해야 했었다.

한때 한국화의 붐으로 촉망받던 전업작가로서 부러울 것이 없었지만 서양화 선호시대가 도래하면서 경제적으로도 힘든 시기였기에 그 돌파구를 찾아 선택한 것이 부산 100경이었다. 자연스럽게 이 작업에 매진하면서 부산 속으로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는 흔히들 말하는 명소보다 그곳에 담겨진, 그곳만의 강력한 이미지를 찾았다. 어느 날 산복도로 버스 안에서 내려다보는 부산항 그리고 계단과 골목길을 따라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산동네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착상이 정리되었다. 화집과 물감통, 카메라를 들고 틈틈이 찾아나섰다.

실경(實景)을 그리고자 했다. 그리는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풍경은 카메라에 담아 화실에서 계속 작업으로 마무리했다. 마침 부산시에서도 '부산 100경'을 선정하고 있을 때여서 우연치고는 묘하게 관심을 끌었다. 2003년 그가 그린 부산 100경을 부산시청 전시실에 걸었다. 한국화의 단조로운 표현으로 자칫 비슷한 구도, 유사한 색채감들로 차별성이 없어지기 쉬운 딜레마에 빠지지 않기 위해 잠시도 곁눈질을 하지 않았다. 

허휘 선생은 경남 함양군 지곡면 산골마을 허씨 문중 집성촌에서 태어나 자랐다. 머슴 둘을 둔 양조장집 아들이라 귀하게 자라면서 담임선생님에게 배운 그림 솜씨로 함양 천령예술제 미술실기대회에서 교육감상을 받았다. 개천에서 용났다고 야단이었다. 신이 나서 밤에도 등잔불 밑에서 그림을 그렸다. 고향 선생님들은 "너는 커서 화가가 되거라"며 어린 소년의 등어리를 토닥거려 주었다. 소년의 그림공부는 중학교에 진학해서도 계속되었다. 정문현 미술교사에게서 기초부터 체계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림 그리는 일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다.

그런 소년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아버지의 사업체가 있는 거창중으로 전학을 가게 된 것이다. 그 시절 상치교사(相値敎師)로 온 미술교사는 그림에 문외한이었다. 자연스럽게 그림 그리기가 싫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아버지의 사망 이후 가세가 급격히 기울면서 학비조달도 어려워 중간고사도 못 치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꾹 참고 진학했던 대학도 진득하지 다니지 못하고 중퇴하고 만다.

하나, 그림에 대한 향수는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30세 때 붓을 다시 들었다. 거처없이 함양에서 지리산을 유람하며 혼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화라면서 중국산수화를 모방하고 있는 화법에 진저리 나서 독특한 '허휘화법'을 구사하기 위해 거침없이 붓을 휘둘렀다.

34세 때인 1997년 부산 광복동 로얄호텔 개업 때 개업 초대전을 열었다. 한국화가, 서예가들이 초청되는 전시회에 개인전을 편 것이다. "무언가 부족한 듯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다른 세상의 그림"이라는 평을 받는다. 이후 부산에 정착한다. 괴정 동아대 농과자리(지금의 자유아파트)에서였다. 주위에서 "청초에게 가 봐라. 우당에게 가서 배우라"는 등 동정어린 권고에 동요하지 않고 혼자의 그림세계에 빠졌다. 

허휘 선생에게도 마음속 깊이 존경하는 선생이 한 분 있다. 서울서 활동하는 풍곡(豊谷) 성재유 선생이다. "누구는 장미, 누구는 무엇 하면서 때 묻은 화가들의 그림 흉내내지 말고 오로지 네 그림을 그리라. 그리고 돈 욕심 내지 말고…."

1992년 중화문물교류학회 초청으로 중국 북경과 서안으로 그림여행을 떠났다. 중국 측 교류학회 부회장 허청송의 도움으로 서안박물관과 고분 그리고 석굴벽화를 답사했고, 당시 개방조차 하지 않던 병마용박물관도 둘러봤다. 그렇게 1995년까지 중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중국여행 화첩' 7권에 300여 점의 그림을 그려왔다. 이를 창원시 성산아트홀에서 전시했다.

허휘의 그림세계는 다양한 기법이 망라돼 있다. 크레용화-수채화-유화-한국화 필법까지 한 화폭에 수용하여 표현하고 있음이다. 부산 100경도 각 구청마다 순회전시를 마쳤다. 분명 새로운 세상이 화폭 속에 펼쳐지리라. 기대하는 바람이 그래서 크다. 

문의 010-2895-4148 / 부산민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