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그림글자'를 창안해 낸 김종문 씨가 휘호를 정리하고 있다.

- 청남 선생에 고교때부터 수학
- 초기에 '장난같다' 비판받아
- "글의 무게 모르면 병스러워"

송도백사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현재 김종문(74) 선생의 서실을 찾았다. 좁은 서실 벽에는 학이 나래를 펴고 날아갈 준비를 하고 있고, 남녀가 손잡고 파안대소하듯 쓴 '웃음'이란 글자는 그린 듯 엉거주춤 서 있다. 한쪽 편 쓰다 버린 파지 사이에서는 수많은 그림글자들이 배시시 내다보며 무슨 글자를 만들지 고민하는 작가를 되레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듯하다.

한글을 상형화(象形化)한 그의 서체는 세간의 관심거리였다. 서울의 서희환이 한글을 판문체로 쓰고 있을 뿐 상형화 한글이란 용어도 낯설었을 때였다.

현재의 서예수업은 경남상고 2학년 때부터 비롯된다. 어느 날 개천예술제에 서예출품을 한 친구가 상을 받아왔다. 어떻게 글을 쓰게 됐느냐고 물으니 '우리 학교에 유명한 서예선생이 계시는데 몰랐느냐'란다. 용기를 내 서예반에 들었다. 청남 오제봉 선생의 제자가 되어 스승의 서체본을 따라 부지런히 익혔다.

서예반 인연으로 국립부산사범대학 미술과에 진학했다. 청남 선생의 서예수업은 대학에서도 계속되었다. 체본에 따라 해서·예서를 익히면서도 정작 자신의 관심은 전서에서 얻는 느낌이었다. 참고자료가 거의 없던 시절 대학도서관에 소장한 서체본을 탐독했다. 뜻글을 제대로 쓰기 위한 작업은 혹독했다. 한시를 읽고 해석할 줄도 알아야 했다. 그러면서 틈틈이 한글을 전자(篆字)처럼 조형화하는 작업도 병행했다. 가끔 전시장에서 보았던 '재미있는 글자'들을 옮겨도 써 보면서 한글서예 아니 그림글자에 차츰 빠져들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스승으로부터 꾸중도 들었다. 곶감과 호랑이 전설 속의 '범 타는 신선' 얘기로 꿈을 깨라 했다. "장난 그만하고 이젠 글 써라." 스승조차 그의 한글 조형작업을 못마땅하게 본 것이다.

그러나 현재에게 용기를 준 것은 화우 심명보였다. "뭐한다고 남 체본 받아 쓰고 있노, 인자(이젠) 네 글 써라." 정신이 맑아졌다. 그렇다. 지금껏 공부한 서예는 중국 대가들의 글을 본떠 쓰는 공부였지 않느냐.

김종문은 대학에서 회화공부한 직감을 응용하여 '나만의 글자'를 쓰기로 했다. 그렇게 연구하여 쓴 글을 영남서예인연합대전에 출품했다. 당시 회원들은 김종문의 서예작품 앞에 서서 '이게 정말 서예다'라며 손뼉을 치면서 새로운 글씨 탄생을 격려해 주었다. 그때서야 스승도 "그래, 너는 그렇게 글을 써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비로소 스승으로부터 그간의 각고노력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부산미술대전에서 특선 수상을 한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호롱불, 촛불 켜 놓고 밤이 맞도록 글을 쓰면서 스스로를 닦아온 덕분이었다. 2세 때 부친 잃고 모친의 보살핌으로 자라면서 몸에 밴 절제와 과묵의 생활습성도 서예정진에 도움이 되었으리라.

학의 모습을 좇아 '학'을 썼다. 붓을 크게 찍어 부리를 그리고 길게 내리 그으면서 몸통과 다리를 그렸다. 실물을 형상화시키니 좋은 글이 되었다. '어머니'란 글도, '웃음'이란 글도 그렇게 썼다. 한글학회에서는 '웃음'을 1991년 12월호 표지로 선택하여 썼다.

사람들도 모두 한글서예의 새로운 발견이라 했다. 그간 한글은 소리 글이므로 형상화될 수 없다고만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김종문은 획을 굵게 가늘게 때로는 길게 변화를 주는 등 우리 글에 예술성을 입혀 마치 뜻글처럼 새 옷을 입혔다. 바로 '그림글자'였다. 그러나 '그림글자'에는 묵은 맛이 있어야 했다. 조화스럽지 못하고 유행스러워 촌스러운 맛이 풍기는 것은 차라리 개탄스럽기까지 한 것이다. 글자의 맛, 글자의 구성이 잘 어울리지 않는 모습도 개탄스럽다. 문자의 변화는 재미있으나 서예의 맛을 못 느끼고 쓰면 차라리 병스럽기 쉽다는 것이 김종문의 지론이다. 글자가 가진 무게, 조형미를 재미로 느끼면 병스러울 수가 있다는 말이다. 김종문은 조화롭지 못한 것이 일반화되었을 때의 우려가 크다고 얘기한다. 요즘 부쩍 어리숙한 표현을 한 재미있는 글씨, 자유중심의 글씨가 대세를 이루면서 '그림글자' 흉내를 내고 있으나 멋을 모르고 흉내만 내면 도리어 이상한 멋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재 김종문의 '그림글자'는 김종문만의 글이다. 그간 참으로 길고 고독한 글 여행이었다.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을 선택하느냐는 주위의 권고도 수없이 들어왔다. 그렇기에 김종문의 '그림글자'는 결코 우연히 탄생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의 타고난 그림그리는 예스러운 품성도 있지만 스승 오제봉 선생 그리고 한국화가 청초 이석우 선생, 서예 서각가 김봉근, 의석 김재화 제씨들과의 교유들도 그를 항상 격려해 왔다. 20세가량 많은 이들로 인해 김종문은 한문자의 조형미와 상형적인 미적 표현에 영향을 받아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길을 얻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