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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의 재발견 <15> 사하품앗이

'돈 없이 사는 세상'… 평범한 재능도 나누니 꿈이 새록새록 현실로

  • 국제신문
  • 정철욱 기자 jcu@kookje.co.kr
  •  |  입력 : 2013-04-10 19:16:26
  •  |  본지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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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품앗이 회원들이 지난 4일 사하구 괴정동 동아공고 뒷산에서 쑥을 캔 뒤 야외 식사를 즐기고 있다. 사하품앗이 제공
◇여가시간 활용 노동력 맞교환

- 아이 봐주고 집안청소 도움받고
- 현금대신 가상화폐 '송이'로 거래
- 놀이터 등 3곳에 공동텃밭 운영도

◇사회적기업 등록 포기했지만…

- 회원 재능 활용 '목욕타월' 개발
- 월 평균 700~800만 원 매출 올려
- 마을위해 사용하려 차곡차곡 저축

10일 오후 주택가에 위치한 부산 사하구 괴정동 승학 놀이터에는 5명의 어린이가 놀이기구를 타며 뛰어놀고 있었다. 이 놀이터에서 어린이가 부모 없이 뛰어놀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모여서 담배를 피우는 청소년이나 술을 마시는 노숙인이 많아서다. 인근 주민도 불안해하며 밤에는 외출도 꺼리던 참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지역공동체 사하품앗이가 벽화를 그리고 난 후 상황은 변했다.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담벼락에 동산에서 토끼, 기린이 뛰어노는 화사한 벽화를 그리자 거짓말처럼 불량 청소년이나 노숙인의 방문이 줄어들어 마음 놓고 놀이터를 이용할 수 있게 됐다. 지역 공동체의 작은 실천이 일으킨 마법 같은 변화다.

■돈 없이 살아보자

   
지난해 5월 괴정동 협진태양아파트에서 노인과 어린이들이 함께 상자텃밭을 가꾸는 모습.
사하품앗이의 출발은 '돈 없이 살아보자'는 황당한 발상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현금이 아닌 가상 화폐 '송이'를 사용하는 경제생활공동체라는 점이 다른 지역공동체와 구분되는 특징이다. '송이'라는 이름에는 꽃 한 송이가 모여 다발이 되듯 사하품앗이에 한 사람, 두 사람이 모여 큰 공동체를 이루자는 소망을 담았다. 회원 간 거래는 현금 대신 송이로 이뤄지고 거래사항을 사하품앗이에 홈페이지나 전화로 알리면 개인 계좌에 반영한다.

사하품앗이는 2006년 주부들이 캐나다의 작은 섬마을에서 시작된 지역화폐운동(LETS·Local Exchange and Trading System)에 매료돼 주부들이 공부모임을 결성하면서 1년 후 지역공동체로 발전했다. 지역화폐의 목적은 한마디로 '돈은 돈의 위치로 돌려놓고 인간다움을 되찾자'는 것이다. 거래와 교환에 필요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 돈이 삶의 목표가 돼버린 현실에 대한 비판이다. 지역화폐운동에서는 개인의 노동력이 돈을 대신한다. 한국 전통사회에서 서로 품을 지고 갚으며 힘든 일을 함께해냈듯 작은 재능만 있으면 경제활동에 참여하고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여기서 필요한 재능이란 아이 돌보기, 청소하기처럼 기업체에서 돈으로 교환하기는 어렵더라도 생활에는 꼭 필요한 노동력을 말한다. 맞벌이로 어린 자녀를 돌볼 수 없는 부모가 있다면 이웃 주민에게 탁아를 부탁하고 가상 화폐 송이를 지불한다. 아이를 맡아주고 송이를 받은 주부는 이 송이를 이용해 장터에서 필요한 물건을 구매할 수 있다. 맞벌이 부부도 주말에 남는 시간을 활용해 다른 집의 일을 돕거나 자신의 집에서 천연비누 만들기 같은 강의를 개최해 참가자로부터 송이를 받아 적립한다.

이렇게 송이가 생활에 필요한 현금을 대신하면서 얻게 된 효과는 절약 이상의 의미가 있다. 지역경제생활공동체 생활에 참여하며 이웃 간 접촉이 잦아지자 주민 사이에 신뢰가 싹트고 정이 생겼기 때문이다.

■'송이'가 불러온 변화, 신뢰회복

   
지난해 10월 사하구 괴정 4동 승학어린이 놀이터에 벽화를 그리는 사하품앗이 회원들.
대뜸 돈 없이 살아보자니 아무리 좋게 말해도 뜨악할 법하다. 말이 좋아 품앗이지 앞집 식구 얼굴도 모르는데 어떻게 내 아이를 맡기고, 내 집의 일을 도와달라고 한단 말인가. 원리야 이해하지만, 마음이 동하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럼에도 이현정 사하품앗이 대표는 "지역화폐 사용은 먼저 이웃 간 신뢰를 쌓는 게 중요하다. 우리를 경계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아파트 같은 곳에 찾아가서 천연비누 만들기 등 쉽게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강의를 하면서 사람들을 알아갔다"고 말했다. 접촉이 잦아지자 경계가 풀리면서 사하품앗이의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이 늘었다. 점차 사하품앗이의 가입자가 생겼다. 신뢰가 사하품앗이의 토대인 셈이다.

이 시작은 '품앗이 학교'라는 이름으로 사하품앗이를 이끄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회원들은 무엇이든 하나를 배우면 공유하기에 여념이 없다. 천연비누 만드는 법을 배우면 이웃을 모아 자신의 집에서 품앗이 학교를 개최하고 수업료로 송이를 받는다. 다른 회원은 요리교실을 열어 자신의 재능을 뽐낸다. 이렇게 컴퓨터, 재봉, 천연 염색 등 다양한 강의가 회원의 자택이나 공공장소에서 수시로 열린다.

이렇게 만난 회원들은 각자의 취미에 맞는 소모임도 만들었다. 사하품앗이에서는 회원 간 교류를 돕기 위해 음식과 물품을 나누는 '품앗이 만찬'을 개최한다. 만찬이라고 거창한 것은 아니다. 지난 4일 동아공고 뒷산에서 쑥을 뜯으며 품앗이 만찬을 열었다.

돈독한 관계를 쌓은 회원들은 승학 놀이터의 예처럼 마을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지난해는 괴정동 아파트 2곳과 놀이터 1곳에서 텃밭을 키우는 도시 농업을 시도했다. 텃밭을 일구는 농부는 다름 아닌 어린이와 아파트 노인회 어른들이다. 놀이터와 노인회관이 인접한 괴정동 협진태양아파트의 텃밭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노인과 어린이가 함께 가꾸며 단절된 세대가 소통하는 장이 됐다. 송이 유통에서 시작한 사하품앗이의 활동이 마을 곳곳을 인정이 넘치는 공간으로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평범했던 회원들의 재능 발견

사하품앗이는 회원들이 매달 5000원씩 내는 회비로 운영된다. 전체 회원은 수백 명이지만, 회비를 내는 정회원은 50여 명밖에 되지 않는다. 이 돈으로는 사무실 임대료와 상근 직원의 인건비도 감당할 수 없다. 지난해까지는 예비사회적기업으로 등록돼 인건비를 지원받았지만, 정식 사회적기업 등록은 포기했다. '주식회사'라는 이름을 달아야 했기 때문이다. 돈 없이도 사는 세상을 꿈꾸는 마당에 주식회사라는 이름은 마뜩잖았다.

단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원금을 포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하품앗이만의 대박 상품이 있기 때문이다. 사하품앗이는 인조견(비스코스 레이온) 원사로 만든 황실목욕 타월을 생산·판매한다. 아프지 않게 때를 밀 수 있어 아토피가 있는 어린이나 피부가 약해진 성인 사이에 입소문이 났다. 이 상품의 한 달 매출이 1300만 원을 기록한 적도 있을 정도다. 평균적으로 700만~800만 원의 월 매출을 올리고 있다.
황실목욕 타월이 탄생한 계기는 의류학과 출신의 한 회원이 대학 재학시절 조선 시대 임금이 비단으로 목욕했다는 문헌을 본 경험을 기억해낸 데서 시작됐다. 이 이야기를 들은 다른 회원들이 흥미를 느끼며 상품 개발을 위한 조사에 착수했고 2010년 특허등록까지 마쳤다. 이 상품을 판매한 돈은 앞으로 마을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차곡차곡 적립되고 있다.


# "골목상권 우리가 사수"

- 폐업위기 동네빵집 등 회원 가맹점 등록 이용
- 상점은 수익 환원 '화답'

경제생활공동체라는 특징을 지닌 사하품앗이는 대기업의 침투에 맞서 골목상권 살리기에도 일조하고 있다. 대기업 제과점에 밀려 폐업 위기에 처했던 동네 제과점이 사하품앗이 회원들의 '입 광고' 덕에 점차 회복하고 있다.

괴정4동에는 25년 된 제과점 '카렘제과'가 있다. 지역아동센터나 노인에게 후원도 하며 제과점을 원활하게 운영해왔다. 하지만 3년 전 인근에 대기업이 운영하는 제과점이 들어서면서 위기가 닥쳤다. 대기업 제과점은 영업을 시작하자마자 할인을 하며 물량공세를 퍼부었다. 카렘제과를 찾아오는 발길은 뚝 끊겼고, 대기업 제과점은 손님 문밖으로 줄까지 섰다.

젊어서 빵이 좋아 빵 굽는 일을 시작했던 남조욱 씨는 심한 스트레스로 담배가 늘었고, 2년 전 급성 폐암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현재는 아내 하분자 씨와 대학원생 아들이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폐업 위기에 처했던 제과점은 올해 들어서야 간신히 수지타산을 맞추기 시작했다. 하 씨는 이렇게 된 데에는 사하품앗이의 도움이 컸다고 말한다.

"대기업 제과점과 동네 제과점의 결정적 차이는 광고인 것 같아요. 대기업 제과점은 빵에 딸기향을 첨가해요. 동네 빵집은 딸기를 넣죠. 광고 못하는 동네 빵집은 이 차이를 알릴 수 없잖아요. 사하품앗이 회원들이 동네 사람들에게 이런 점에 대해 '입 광고'를 해줬죠. 그 덕에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아졌어요."

카렘제과는 사하품앗이의 가맹점으로 등록해 회원에게 10%를 할인해주고 있다. 사하품앗이에 등록된 가맹점은 전체 30개. 많은 수는 아니지만 이 가게들이 동네 상권에 파급효과를 일으킨다.

하 씨는 "작은 가게니까 필요한 재료를 대량으로 들여오기보다 근처 상점에서 구입하거든요. 동네의 다른 가게도 다 마찬가지죠. 한 가게가 문을 닫으면 다른 가게도 다 손해를 보는 거에요. 사하품앗이 회원처럼 많은 주민이 동네 상점을 이용해줬으면 해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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