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중공업 고 최강서 씨의 부친인 최용덕(가운데) 씨가 5일 국회에서 새누리당 의원들과 면담을 요구하다가 경비원들에게 끌려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 노사민정협의회 사실상 손놔
- 정치권도 무관심, 해결 외면

- 민주노총 등 외부단체 개입이
- 사태해결 어렵게 만든 측면도

- 사회적 갈등조정 작동 않으면

- 한진중 유사사태 언제든 재발

- 근본적으론 사회안전망 확충

- 해고·휴직 땐 국가가 책임을

한진중공업의 '시신투쟁'에는 우리 사회의 갈등과 상처가 응축돼 있다. 조선경기 불황에 따른 기업활동 위축과 반복되는 노사 갈등은 부산 경제를 위협하는 심각한 요소다. 새해 벽두부터 몰아친 노사 갈등을 해결하지 않고선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약속한 '100% 국민행복시대'도 요원하다.

전문가들은 우선 지난해 12월 한진중공업 복직 노동자 최강서(당시 35세) 씨가 스스로 목숨을 버리게 된 원인부터 진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사회적 갈등 조정 기능이 작동하지 않으면 한진중공업과 유사한 일이 언제든 재발할 수 있는 만큼 개별 사건으로 보지 말고 범정부적 대책을 마련하자는 목소리도 높다.

■식물상태 '노사민정협' 깨워라

한진중공업 노사는 5일 현재 대화의 여지를 남겨뒀지만 협상을 재개하지는 못하고 있다. 노조는 '사측이 협상 일정을 잡으면 시신을 조선소 밖으로 옮기겠다'는 입장인 반면 사측은 '시신을 밖으로 옮기면 협상할 수 있다'고 맞서고 있다. 문제는 노사를 오가며 중재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허남식 부산시장이 위원장인 부산 노사민정협의회 역시 사실상 손을 놓은 상태다. 정치권 역시 별 관심이 없다. 민주통합당의 제안으로 노사와 여야정이 참가하는 '2+3 협의체'가 구성된 쌍용차 사태와는 대비된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부산지부장인 최성주(법무법인 부산) 변호사는 "노사가 상대를 불신하며 대화를 안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서로 만나야 양보 안도 나올 것 아닌가"라며 "필요하다면 허 시장과 지역사회 원로들이 중재를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또 "한진중공업은 개별 기업이 아닌 부산 전체의 문제로 비화돼 노사가 자율적인 해결 방법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면서 "어느 나라든 갈등을 예방하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성숙한 사회일수록 이해관계를 조정해 나가는 과정은 매끄럽다"고 덧붙였다.

■노동법·사회안전망 손질해야

	금속노조가 최강서 씨의 시신을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안으로 옮겨 농성 중인 가운데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5일 선박 건조작업을 하고 있다. 김동하 기자

한진중공업과 쌍용차 사태는 모두 정리해고→파업→타결→손해배상소송과 가압류→재투쟁(파업)의 악순환을 밟았다. 사측이 파업에 따른 손실을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과정에서 2차 갈등이 촉발되고 있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최강서 씨는 유서에서 "민주노조 사수. 158억. 죽어서도 기억한다"는 문구를 남겼다. 158억 원은 지난해 노사 합의 이후 사측에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 금액이다. 쌍용차 역시 비슷하다. 서울지방변호사회에 따르면 2009년 대량 정리해고 이후 복직투쟁을 벌인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을 상대로 사측과 국가가 낸 손배소 청구액은 총 430억 원에 달했다.

부산경실련 차진구 사무처장은 "사측은 손배소를 통해 노조를 길들이려고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또 다른 투쟁만 촉발시켜 경영이 다시 불안해진다"고 했다. 최성주 변호사 역시 "파업과 관련한 손배소 제도는 국회 차원에서 손을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의 개입이 사태해결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지적도 높다. 민주노총 금속노조가 복수노조 출범으로 소수가 된 한진중공업 지회의 상급단체 자격으로 농성과 투쟁을 지원하고 주도하면서 전국적인 노동문제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학계의 한 인사는 "한진중공업 사태가 재계 대 노동계의 대리전으로 변질돼선 곤란하다"면서 "민주노총 지도부가 개입하는 것이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되는지도 따져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산상의 박종수 상근부회장은 "한진중공업은 지역을 대표하는 대기업이다. 이런 기업이 외부 세력에 의한 정치적 이슈화에 희생되고 있어 안타깝다. 기업은 무엇보다 정상적인 경영이 최우선되어야 하고 노사문제도 그 속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더는 기업이 특정 단체나 집단의 이해를 관철시키는 수단으로 활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근본적으로는 사회안전망 확충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많다. 정리해고나 휴직이 불가피하다면 노동자들이 최소한의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 화합의 노사관계가 국민대통합 시금석

- 해묵은 갈등구조 개선, 朴당선인 해결 노력을
- 민주노총 · 전경련도 끌어들여 노사정위 실질적 효과 꾀해야

박근혜 정부의 가장 큰 과제 중 하나는 계층·지역·세대별로 찢겨진 갈등의 통합이다. 특히 노사관계는 100% 국민대통합의 시금석으로 꼽힌다.

박 당선인도 후보 시절 노사 관계의 주요 쟁점인 일자리 만들기·비정규직 보호·노동기본권 강화를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해결하겠다고 수차례 밝힌 바 있다.

특히 올해 출범 15주년을 맞은 노사정위원회의 역할과 위상이 새 정부에서 어떻게 설정될지를 놓고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정부는 1997년 말 'IMF 구제금융 사태'로 촉발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사정위원회를 발족했다. 그동안 노사정위는 다양한 의제와 관련해 150여 개에 달하는 합의문을 도출해 내며 우리 사회의 갈등조정 기구 역할을 일정 부분 수행했다.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1998년)과 노사민정 합의(2009년)를 통해 두 차례 국가적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크다. 우선 노동계의 큰 축인 민주노총과 재계를 대표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불참하고 있어 실효성 없는 논의가 이뤄지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높다. 한진중공업이나 쌍용차 사태에서도 노사정위의 역할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국민대통합을 내세운 박 당선인의 가장 큰 과제는 노사정위라는 기존 인프라를 통해 해묵은 노사 갈등구조를 개선하고 사회적 대타협을 이뤄내는 것이다. 정리해고, 손해배상소송, 일자리 나누기 등 모든 노동 쟁점을 놓고 허심탄회하게 논의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 조속 정상화·경영혁신 땐 '조선업 종가' 재도약 잠재력 충분

- 영도조선소 협소한 부지 고려, 대형보다 특수선 제작에 주력
- 해양플랜트 분야 개발도 박차

지역 경제계는 우리나라 조선업계의 종가인 한진중공업이 극심한 침체의 늪을 벗어나 재도약할 수 있을지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 등 조선업계 '빅3'가 신기술 개발 및 고부가가치 선박 건조 등 사업 다양화에 매진하는 동안 한진중공업은 수년간 노사 갈등으로 정상적인 기업 경영이 불가능했다.

5일 조선업계에 따르면 조선업계 '빅3'는 해양플랜트 산업의 성장에 발맞춰 올해 경영목표를 지난해보다 18~52% 높게 잡았다. 지난해 해양플랜트 산업의 세계 시장 규모가 1500억 달러를 넘어설 정도로 고속성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는 중동, 서아프리카, 사할린 등에서 석유를 대체할 천연가스 개발사업이 벌어지면서 해양플랜트 분야의 미래가 밝아 향후 20년간 매년 7%의 고성장을 이어갈 것으로 보고 있다.

한진중공업에 미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업계는 한진중공업이 이번 사태를 잘 해결하고 고부가가치 분야를 중심으로 경영혁신을 이룬다면 조선업 종가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진중공업 측은 태생적 한계인 생산부지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도조선소에서는 좁은 부지에서도 생산가능한 특수선을 제작한다는 방침이다. '빅3' 조선소의 면적이 495만∼660만㎡(150만∼200만 평)에 달하는 데 비해 영도조선소 규모는 26만4000㎡(8만 평)에 불과해 대형 선박을 건조하기 힘들다. 하지만 쇄빙선, DSV(잠수지원선) 등 특수선 생산에는 지장이 없다.

한진중공업은 원유 시추설비(드릴십) 등 해양플랜트 분야 개발에도 주력할 계획이다. 영도조선소에서 만들기 어려운 대규모 해양플랜트는 수빅조선소에서 건조하는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