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어린이집을 마친 손주의 손을 잡고 집으로 데려가고 있다. 60~70대가 손주를 맡길 곳이 마땅치 않은 자녀를 위해 '황혼육아'에 나서고 있다. 김동하 기자 kimdh@kookje.co.kr

◇노인정이 육아방?

- 손주 둘러업고 모이기 일쑤
- 수다 떨며 서운함 달래기도

◇한평생 육아부담

- 하루 8.86시간 중노동 수준
- 체력저하·건강악화 부작용

◇자식눈치 안절부절

- 종일 뒤치다꺼리 골병나도
- 손주 아프면 '내 책임' 걱정

◇실태파악·지원 시급

- 육아정보 제공 기회 늘리고
- 지자체 차원 대책 만들어야

장면1. "어제 우리 딸이 손녀가 넘어진 걸 알고 난리도 아니었다이가. 어찌나 눈치가 보이던지." "우리 딸은 내가 허리 아프다고 하면 병원 가라고 말만 하고 신경도 안 써. 서운하데이." 부산 부산진구 초읍동 A아파트는 오전 11시께면 노인정에 손주를 둘러업은 할머니가 하나둘씩 모여 수다를 떤다. 대화 주제는 주로 손자녀를 맡긴 아들, 딸에 관한 서운한 점을 털어놓는 것. 박순점(여·70) 씨는 "아파트단지에 손자녀를 봐주는 할머니가 많아서 자주 모여 설움을 털어놓으며 시간을 보낸다"고 말했다.

장면2. 지난 1일 오후 2시께 부산 금정구 NC백화점 내 키즈카페. 3~6세 아이들이 놀이기구를 타며 정신없이 뛰노는 모습을 엄마들이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대부분 20~30대 젊은 여성이었지만 50~60대로 보이는 중장년 여성도 사이사이 눈에 띄었다. 정모(여·63) 씨는 "손자와 매일 집에 있기 갑갑해 가끔 키즈카페에 나와 시간을 보낸다. 처음엔 젊은 엄마들 사이에서 쑥스러웠지만 이제는 옆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아이 키우는 얘기를 나누며 수다를 떨고 있다"고 말했다.

■'내 자식을 위해' 황혼육아 급증

한평생 자녀를 키우는데 헌신한 아버지, 어머니들이 또다시 손자녀를 품에 안는 '황혼육아'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맞벌이 가구가 늘면서 손자녀를 맡길 곳이 마땅치 않은 자녀를 위해 은퇴 후 삶의 여유를 즐겨야 할 60~70대가 또다시 육아전쟁에 뛰어들고 있다.

하지만 아직 지역에서 조부모의 육아 실태를 파악한 사례는 없다. 통계청이 시행하는 인구조사에서 맞벌이부부 현황을 별도로 파악하지 않는 데다, 조부모의 양육 형태가 워낙 다양하기 때문이다. 부산시는 지난해 시의회의 문제 지적에 따라 올해 부산여성가족개발원에 의뢰해 '맞벌이부부 조부모 양육 실태 조사'를 처음 시행한다(본지 지난달 31일 자 10면 보도).

부산여성가족개발원 관계자는 "조부모가 손자녀를 양육할 때 일시적으로 어린이집에 보내는 경우가 있고, 부정기적으로 자녀가 사정이 생길 때만 손자녀를 맡기는 경우 등 워낙 사례가 다양해 조사 표본을 추출하기 어렵다"며 "특히 조부모들이 '자녀를 위해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갖가지 문제를 감내하는 경우가 많아 조사를 거부당할 수도 있어 연구 방향을 잡는데 고심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맞벌이 가구와 한부모가구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어 자녀 대신 손자녀를 키우는 조부모가 늘고 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추산할 수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근로시간 36시간 미만 여성 취업자 중 배우자가 있는 경우' 조사 현황을 살펴보면 2009년 119만5000명에서 2010년 137만 명, 2011년 157만9000명으로 꾸준히 늘고 있다.

또 최근 노인일자리사업으로 만 65세 이상 여성 노인이 출산가정양육도우미와 보육교사도우미로 나서고 있어 황혼육아와 노인일자리를 연계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부산시는 올해 노인일자리사업에서 양육 도우미 820명을 선발할 계획이다.

■조부모, 자녀, 손주 '힘들어'

황혼육아가 늘어나면서 그에 따른 부수적인 문제도 발생하고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조부모의 급격한 체력 저하와 건강 악화로 의료비 부담 등의 사회적 비용 부담이 늘어나는 점이다. 최근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100세 시대 대비 여성 노인의 가족 돌봄과 지원방안 연구'에서 손자녀를 돌보는 수도권 여성 노인 300명을 대상으로 노동시간을 조사한 결과, 하루 평균 8.86시간씩 일해 '중노동' 수준의 근로를 견뎌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6세 손자를 봐주는 최영실(여·65) 씨는 "한참 뛰어다니는 손자를 쫓아다니다 보면 금세 체력이 바닥나 온몸이 쑤시고 밤마다 끙끙 앓는다. 관절염, 목디스크 같은 예전에 없던 병이 생겨 치료비 부담도 크다"고 털어놨다. 4세 손녀를 키우는 김순옥(여·62) 씨는 "종일 손녀 뒤치다꺼리를 하고 나면 친구 만날 시간도 없다. 늙어서 내가 왜 이 고생인가 하는 생각에 우울증까지 생겼다"고 말했다.

양육문제를 둘러싸고 자녀와 갈등을 겪는 일도 있다. 최윤자(여·57) 씨는 "젊은 엄마에 비해 정보가 부족하다 보니 매일 손녀와 집에만 있게 된다. 교육을 받고 싶어도 어디에 문의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직장인 하모(여·34) 씨는 "부모님께 아이를 맡겨 죄송하지만, 가끔 아이가 다치거나 이상한 사투리를 말하면 나도 모르게 어머니께 주의해달라고 요구해 불편해질 때가 있다"고 말했다.

■제도적 지원 뒷받침돼야

정부나 지자체가 황혼육아 실태를 파악하거나 지원하는 사례는 드물다. 시에 따르면, 지역 내 조부모가 참여할 만한 육아 교육은 부산시보육지원센터가 지난해 개설한 '알콩달콩 손자녀와 함께하는 손놀이'가 유일하다. 시보육지원센터는 지난해 조부모 80명을 대상으로 손을 이용한 율동과 노래를 가르쳐 큰 호응을 얻었다. 이에 올해 4월 또다시 조부모 육아 교육을 개설하기로 했다.

인구보건복지협회 부산지회는 지난해 2차례에 걸쳐 조부모 육아교실을 개설해 호응을 얻었으나 올해 예산 삭감으로 없앴다. 인구보건복지협회 부산지회 관계자는 "조부모들이 '올해는 교육이 없느냐'고 문의를 계속해 죄송하다는 말만 하고 있다. 지자체 차원에서 관련 교육을 개설하면 좋을 것"이라고 의견을 냈다.

황혼육아가 증가하면서 이에 따른 사회적 문제가 야기되고 있는 만큼 지자체 차원에서 이 문제에 관심을 두고 조부모의 육아를 돕는 제도적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시 김희영 출산보육담당관은 "황혼육아 문제는 출산과 노인 문제가 얽혀 있어 전담 부서를 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며 "출산장려 분위기 조성을 위해 지원책을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 이성숙 부산시의원

- "교육·방문서비스 등 적극 나서야"

"평생 사랑으로 자식을 길렀던 부모님께서 이제 그 자식을 위해 또다시 '황혼육아'를 떠맡아야 하는 것이 요즘 현실입니다."

부산시의회 이성숙(비례·사진) 의원은 지난해 처음 부산시에 황혼육아 문제의 심각성을 제기하고 현황 파악과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이에 따라 시는 부산여성가족개발원에 의뢰해 '맞벌이부부 조부모 양육 실태조사'를 처음 시행하고 대책 마련에 나섰다.

"제 주변을 둘러보면 결혼과 출산 이후 육아 부담으로 고통을 받는 직장 여성이 매우 많아요. 아이를 믿고 맡길 만한 곳이 마땅치 않은 데다 양육비용 부담이 너무 크다는 것이 문제죠. 이들 여성이 결국 기댈 곳은 조부모뿐이라 황혼육아 가정이 늘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의원은 부산시가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해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지만, 뚜렷한 묘안이 없는 만큼 '직장맘' 육아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야 하며, 이를 위해 시가 정책적으로 황혼육아에 관해 관심을 둬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부모가 손자녀를 키우는 가정이 늘면서 서울에선 기초자치단체가 이들을 위해 정확한 발음법 교육과 영어·한글 교실을 마련하고 있다고 합니다. 황혼육아에 따른 조부모의 부담이 큰 만큼 지자체 차원에서 이들을 위한 다양한 교육과 보육 서비스, 공간 마련에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 의원의 문제 제기에 따라 시는 올해 지역 황혼육아 현황 파악과 조부모를 위한 육아 매뉴얼 보급 등을 준비하고 있다.

"황혼육아는 저를 포함해 몇 년 뒤 우리가 직면할 문제입니다. 시가 조부모를 위해 육아 교육 확대와 방문서비스 제공, 운송수단 지원 등 양육 부담을 덜어주는 데 적극 나서야 합니다. 그래야 젊은 여성이 마음 놓고 아이를 낳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