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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년 산수 이종률이 부산 동래구 명륜동 자택을 찾아온 학생들과 대화하고 있다. 왼쪽 등 돌린 여학생은 윤연희 씨(1981년 부산양서조합사건으로 구속), 오른쪽 등돌린 남학생은 김종세 씨(1979년 부마항쟁 주도). 산수이종률선생기념사업회 제공 |
# 산수 이종률
- 좌우노선 창조적 융합 시도
- 부산대 교수로 강연 등 매진
- 민족일보 창간·민민청 조직
- 냉전사고 떠나 제3의길 추구
# 윤노빈
- 유일 저서 '신생철학'을 통해
- 분단 아픔·통일의 길 이야기
- "마음이 만든 벽, 실체 없어… "
- 동서양 종교·유럽철학 융합
◇ 산수 이종률
부산은 다양한 사상과 문화를 녹여내는 가마솥이며, 융합도시였다. 산수 이종률이 대표적이다. 산수는 서울에서 한국 최초로 사회주의 학생운동 단체인 '공학회'(1925)를 만들고, 신분차별을 없애는 '형평' 운동에 참여하는 등 일본과 한국에서 사회운동에 앞장선다. 산수가 백정마을을 찾아가 큰절을 올린 사건은 경북 의성 지역의 전설로 남아있다.
■'비좌비우'(非左非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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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6월 4일 부산대 자율도서관 옆에서 열린 산수 이종률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 '아름나라' 어린이 노래단이 고승하 대표의 기타 반주에 맞춰 공연하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산수를 기념하는 나무가 심어져 있다. |
해방이 되자 남로당과 이승만 정부의 노선에 모두 실망하고, 제3의 길을 찾는다. 산수는 좌우 정치세력 어디에도 올바른 사상이 없다며 '비좌비우'를 내건다. 달리 말해 좌우 노선의 창조적 융합을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끝내 전쟁이 일어나고, 서울에서 의료 활동을 하던 부인마저 살해되자 더욱 기존 정치세력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
산수는 자본주의를 옹호하지만, 소수 독점이 아닌 서민 대중을 위한 자본주의를 옹호한다. 또 산수는 민족통일을 지향하지만, 단순히 혈연 공동체의 복원이 아니라, 모든 이가 자유 평등한 민주 공동체의 건설을 지향한다. 그리고 산수는 자주통일을 추구하지만, 주변 열강을 배제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이용하는 자주성을 추구한다.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부딪치는 한반도는 오히려 주변 열강을 슬기롭게 거느려야(外勢領御) 한다는 것.
산수는 이런 희망이 실현될 때 참된 인간 시대가 열린다고 봤다. 산수의 생각은 전국적인 지지를 얻기 시작한다. 1953년 부산대 정치학과 교수가 됐고, 당시 여느 교수와 달리 대중강연과 언론 활동에 힘썼다. 특히 41회에 걸쳐 국제신보(현 국제신문)에 연재한 '백만 독자의 정치학'(1958)이 인기를 끌었다 한다.
■평화의 메시지
산수는 '민족일보'(1961)를 창간하며 교수직을 내놓는다. 요즘 '폴리페서'(정치지향 교수)가 교수 본분에 소홀하면서도 교수직에 연연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또 '민족문화협회'(1954)와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 1960)을 만드는데, 소설가 김정한, 이주홍, 무용평론가 강이문도 참여한다. 민민청은 서울, 대구로 지부를 넓히며, 한국 사회운동의 구심점이 된다.
민민청은 냉전적 사고에서 벗어나 세계평화의 메시지를 던졌다. 그러나 두 번에 걸친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시련을 겪는다. 2차 인혁당 사건(1974)으로 사형을 받은 8명 가운데 5명이 민민청 관련자. 특히 이수병은 부산대 출신으로 산수가 아끼던 제자이다. 1974년, 산수는 의령에서 백산과 이수병의 본가를 방문하고 오다 쓰러지고, 오랜 투병 끝에 생을 마친다. 제3의 길은 끝내 설 자리가 없는 걸까. 지난 2008년, 사법부는 인혁당 사건을 무죄로 판명했다.
◇ 윤노빈
"1974년 1월을 죽음이라고 부르자."(김지하, '1974년 1월') 윤노빈은 1974년 '신생철학'이란 책을 펴낸다. 1974년은 유신정부가 '긴급조치'를 선포하며, 친구 김지하 시인이 사형 선고를 받은 해이기도 하다. 바로 이때 윤노빈은 '새로운 삶'(新生)을 말한 것이다. '신생철학'은 한반도의 고통이 분단에서 비롯한다고 본다. 그래서 '신생철학'은 분단 철학이 아닌 통일 철학. 통일은 '우리'를 찾고 '큰 우리'를 찾는 과정이다.
■통일의 철학
앞서 산수 이종률은 대아(大我) 통일, 동경(同慶) 통일을 말했다. 남북이 '큰 우리'를 찾아, 함께 승리하는 통일을 뜻한다. 이제 '신생철학'은 말한다. '큰울'(큰 우리)은 '한울'(하늘)이라고. 원래 하늘은 두 동강난 적이 없는데, 그렇게 분단된 것처럼 보이는 건 우리가 냉전의 시각으로 우리를 보기 때문이라고. 그러니 우리 마음이 만든 벽이 실체가 아님을 깨달으면, 통일로 가는 길이 처음부터 열려 있었음을 안다고. "나는 이제 벽을 부수지 않는다. … 웃다가 벽 속으로 걸어갈 뿐이다." (정호승 '벽')
한울은 통일이다. 한울은 우리이며, 우리가 한울이다. 멀리서 한울을 찾지 말고, 가까운 이웃과 형제에서 찾자는 말이다. '신생철학' 마지막 장에는 사람을 눈동자로 삼은 '브니엘'(하느님 얼굴) 그림이 있다. 이웃과 형제 얼굴에서 하느님 얼굴을 본다는 것. 동학을 비롯한 동서양 종교와 유럽철학이 하나의 통일 철학으로 융합해 있다.
■세계평화의 비전
윤노빈이 남긴 것은 '신생철학'이란 책 한 권뿐. 그러나 이 책은 적어도 통일이 무엇인지, 통일이 우리 삶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생각하게 해준다. 이처럼 산수와 윤노빈은 분단 시대의 삶과 통일의 인문학을 고민했다. 그리하여 부산을 세계평화 담론의 메카로 만들었다. 요즘 우리의 사고가 너무 지역에만 머문 게 아닌지. 지역에 발을 딛고 세계를 생각하는 부산 인문학의 맥을 잃은 건 아닌지 돌이켜보게 한다.
# 김두봉(1889~1960)
항일 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기장 보명학교(현 기장초등)를 나왔다. 주시경의 제자로 당대 최고의 국문법 저서 '조선말본'(1916)을 지었다. 중국에서 항일 운동을 했고, 북한 정부수립에 참여했다. 김일성대학 총장, 북조선노동당 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김일성 개인숭배 비판으로 숙청됐다.
# 이종률(1902~1989)
포항 출신의 사회운동가, 사상가. 호는 산수(山水). 의성, 안동에서 자라고, 서울 배재중학교와 일본 와세다 대학을 다니며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1946년 제3의 길을 모색하며, 성균관대를 세운 김창숙 등과 '민족건양회'를 만든다. 1952년부터 부산에서 서민 대중을 위한 자본주의와 평화통일을 제창하며, 한국 사회운동의 구심점이 된다. 국제신보, 부산일보의 편집고문, 논설위원을 맡았다. 5·16 직후 투옥되고, 1965년에 풀려난 뒤로 집필, 교육, 투병의 삶을 살았다. '에스페란토' 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 윤노빈(1941~ )
김지하 시인과 강원도 원주중학교 동창이며, 서로 깊이 교류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철학박사를 받았다. 1967년부터 부산대 철학과 교수로 지냈다. 1982년 가족과 함께 '월북'했다고 하나, 자세한 내막은 밝혀진 바 없다.
# 대륙 - 해양, 전통 - 현대, 좌파 - 우파…용광로에 녹여
■ 융합도시 부산
부산은 국제적인 항구도시로 대륙과 해양, 전통과 현대, 좌파와 우파 사상을 한 데 녹이는 용광로였다.
한글학자 김두봉(월북)과 한국 민속학의 거장인 손진태(납북)는 각각 기장과 구포 출신이다. 해방 이후 1960년대까지 부산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진보적 사상가들이 폭넓게 활동했다. 전국에서 사람이 모여들었다. 이것은 항구도시 특유의 개방성과 진보성, 또 부산이 임시수도였다는 데서 비롯한다.
이처럼 용광로 역할을 할 때 부산은 지식의 '소비지'가 아닌 '발신지'였다. 또 부산이 발신한 것은 세계평화와 진보의 비전이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정부는 부산대 정치학, 역사학, 철학 등 6개 학과와 법정대를 폐지한다. 이 조치는 4년 뒤에 철회되지만, 대학과 시민 인문학 활동의 통제는 계속됐다. 그럼에도, 부산 인문학의 저력은 역설적으로 이런 고난 속에서 자라났다. 유네스코 세계인문학포럼이 부산에서 열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지훈 철학자·필로아트랩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