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출신인 최병오(60) 패션그룹형지 회장은 살아있는 '동대문 신화'의 주인공이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는 유명한 시구가 있지만, 최 회장은 자신을 키운 것은 '10할이 동대문 시장'이라고 말했다. 그는 "동대문 시장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장사를 배웠다. 동대문은 내게는 '기회의 땅'이었다"고 회고했다.  

'크로커다일 레이디'와 '샤트렌' '올리비아 하슬러' '아날도바시니' '와일드로즈' '노스케이프' 등 다수의 패션 브랜드를 론칭시키며 매출 1조 원을 바라보는 중견 패션기업의 CEO는 30년 전 동대문 시장의 1평 남짓한 점포에서 사업을 일으켰다. 그 마저도 고향 부산에서의 사업 실패로 인한 뜻하지 않은 상경이었다.

"삼촌이 서구 충무동에서 오성 페인트라는 점포를 했는데, 지금 말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그 분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얼떨결에 가게를 물려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망하는 바람에 맨몸으로 상경을 했습니다."

1982년 동대문 시장에서 '크라운 바지'라는 상호로 장사를 시작한 최 회장은 10년 뒤인 1993년에 어음부도로 두 번째 실패를 맛봤다. 

그는 "지금도 하단(부산 사하구)에 살고 계시는 노모가 전 재산인 집을 담보로 잡힌 2000만 원과 내가 융통한 1000만 원을 합친 3000만 원을 종잣돈 삼아 다시 시작했다"면서 "5~6년 동안 하루에 4시간도 자지 않고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때 시장 밑바닥에서 몸으로 익힌 경험과 지혜, 고통 등이 내 사업의 소중한 밑거름이 됐다"고 말했다.

'형지'라는 기업명은 인생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당시에 태어났다. 최 회장은 "등불 형(熒)자에 땅 지(地)자다. 대지를 뒤덮은 불같이 일어나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패션그룹형지는 중견패션기업으로 성장했지만, 백화점 입점 보다는 로드숍(가두점) 위주의 영업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전국 1600여 개의 매장(가맹점) 가운데 50곳 정도만 백화점에 입점하고 있다.

최 회장은 "백화점은 높은 수수료 때문에 고품질에 합리적인 가격의 의류를 지향하는 회사 방침과 맞지 않는다"면서 "아직 백화점이 활성화되지 않은 지역에서는 소비자들의 접근성 측면에서도 제약이 많다"며 로드숍 전략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패션그룹형지가 지향하는 목표는 '국민복' 콘셉트다. 그는 "30~ 60대 여성들이 옷에 스트레스를 안 받도록 싸고 질 좋은 옷을 만들자는 것이 내 경영 철학이자 회사의 방침"이라면서 "4년 전 회사명을 형지에서 패션그룹형지로 바꾼 것도 옷 외에 다른 것은 쳐다보지 않겠다는 의지"라고 강조했다.

로드숍 위주로 마케팅을 진행하다보니 가맹점주와의 관계는 최 회장의 가장 큰 관심사다. 패션그룹형지는 지난 2010년 패션업계 최초로 대리점주를 위한 최고경영자과정(AFH)을 개설해 운영하고 있다. 기수당 55명의 대리점주들이 상품, 영업, 마케팅에 관한 지식과 대리점 경영 노하우를 전수받는 프로그램이다. 또 가맹점주들을 문화공연 같은 행사에 초대해 격려하기도 한다. 지난 9일에는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신년행사에 가맹점주들을 초청해 함께 오페라를 관람하기도 했다.

패션그룹형지는 최근 여성복 중심의 사업구조에서 남성복과 아웃도어 등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지난해 4월 남성복 전문기업 우성I&C를 인수해 기존의 남성 캐주얼 '아날도바시니'와 함께 남성복 시장을 개척할 계획이다. 또 여성전용 아웃도어 '와일드 로즈'를 선보인 데 이어 지난해 또다시 북유럽 정통 토털 아웃도어 '노스케이프'도 론칭하며 경쟁이 치열한 아웃도어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다. 남성복 시장 침체와 국내외 브랜드의 각축장이 된 아웃도어 시장에서 성과를 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최 회장은 "자신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로드숍 전략이 주효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우성 I&C는 인수한 뒤 곧바로 흑자로 전환됐고, 사업 초창기에 다소 어려움을 겪었던 와일드로즈도 이미 흑자로 돌아섰다. 올해 기대가 크다. 노스케이프도 고기능을 바탕으로 한 합리적인 가격 때문에 소비자들에게 점차 인지도를 높이고 있다"면서 "이제 소비자들도 과거처럼 브랜드만 보고 고가의 의류를 구입하지 않는다. 진짜 품질이 좋고 나쁜지 안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최근 창업 열풍에 뛰어든 후배 기업가들에게 큰 꿈과 좋은 습관, 두 가지 교훈을 전했다. 

"실천도 뒤따라야겠지만 먼저 꿈을 크게 갖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동대문 시장 밑바닥에서 시작했지만 나는 단 한번도 꿈을 포기한 적이 없었습니다. 또 좋은 습관은 평생을 좌우할 수 있는 소중한 재산입니다. 근면함은 물론 부족한 것을 남에게 배우고 채우려는 것은 후배 기업가들을 성공으로 이끌 좋은 습관입니다."

▶패션그룹형지는 

지난 1994년 창업 이후 중·장년층 여성에 특화된 제품으로 틈새시장에서 '여성 어덜트 캐주얼' 시장을 창출한 중견 패션기업이다. 1996년 싱가포르 여성 브랜드인 '크로커다일'을 국내에 들여와 선보였다. 크로커다일은 이후 여성 브랜드 최초로 매출 3000억 원대를 돌파한 메가 브랜드로 성장했다. 

이후 여성복 시장에서 시장 점유율 1위를 지키며 2005년 프렌치 캐주얼 '샤트렌', 2007년 '올리비아 하슬러', 2008년 '라젤로' 등을 연이어 론칭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신사복까지 영역을 넓혀 2009년 이탈리아 남성 캐주얼 '아날도 바시니'를 들여온 데 이어 지난해 남성복전문기업 우성I&C를 120억 원에 인수하며 공격적인 경영전략을 펴고 있다.  또 대한민국 대표 생활패션 'CMT' 등 새로운 브랜드를 계속 내놓고 있다. 'CMT'는 글로벌 패스트패션의 대항마로 시장지배력을 계속 확대할 계획이다.

부산 사하구 하단이 고향인 최병오 회장은 향후 부산을 영남권 사업의 중심으로 활용할 복안을 세우고 있다.

패션그룹형지는 지난해 11월 사하구 괴정동에 신사옥(조감도) 건립에 착수했다. 지하 1층, 지상 14층에 총 연면적 8793㎡ 규모로 2014년 1월 완공될 예정이다. 이 사옥에는 패션그룹형지 부산지사를 비롯해 매장과 병원, 은행, 교육연구시설, 오피스 등 다양한 편의·문화시설이 입주한다. 최 회장은 부산사옥에 대해 지역 경제 활성화와 문화 공간 확대, 신성장 모멘텀 확보, 영남지역 유통망 허브 역할 등의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오는 4월께에는 양산에 물류센터와 공장 착공에 들어가며, 매출액 1000억 원 규모의 형지리테일의 본사도 부산으로 이전할 계획이다.

최 회장은 "판매시설과 함께 양산 공장, 물류센터를 갖춘 부산지사는  부산경남지역의 사업 전초기지 역할을 맡는다"면서 "지역의 고용 창출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고향 부산을 자주 찾아 지역사회에 필요한 공헌 활동을 발굴해 지속적으로 실천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한국의류산업협회장을 맡고 있기도 한 최 회장은 부산을 패션섬유산업의 메카로 부활시키기 위한 노력도 진행하고 있다. 최 회장은 "한때 섬유산업의 메카였던 부산의 산업현장에서 봉제 인력이 없어 애를 먹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면서 "조경태 의원와 함께 사하구 장림동 일대에 봉제업종합지원센터 설립을 위해 함께 뛰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