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사람의 야성(野性)을 보여주는 6월 항쟁 시위. 1987년 6월 26일 부산 남구 문현로터리에서 한 청년이 웃통을 벗어젖힌 채 경찰 쪽으로 달려가고 있다.

- 6·25 피란민들을 아낌없이 끌어안아
- 전쟁의 절망 속에서 희망의 불씨 지펴

- 독재정권 무너뜨리고 민주화에 앞장
- 현대사 고비마다 저항횃불 '野性도시'

- 고민보다 행동 먼저…단순무식 비판도
- 이젠 미래지향적 정체성 가다듬을 때

'부산 싸나이' '자갈치 아지매' '부산 갈매기' 그리고 '우리가 남이가'…. 부산 사람의 기질(정체성)을 말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고유명사나 표현이다. 이것만으로 부산 사람의 기질을 규정하기는 어렵다. 이런 틀을 들이대는 순간, 해운대해수욕장에 쌓은 모래성이 파도가 지나가고 나면 무너지는 것처럼 부산 사람을 규정하던 정체성도 사라진다. 부산 사람의 기질은 몇 가지 틀로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역동적이다. 부산시가 '다이내믹 부산(Dynamic Busan)'이라는 구호를 쓰는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 직할시 승격 50주년을 맞아 그동안 숨 가쁘게 달려온 부산 사람의 기질을 재조명해 봤다.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보완해 앞으로 미래 50년의 원동력으로 삼기 위해서다.

■대한민국을 껴안다(포용성, 개방성)

부산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상상하기 어렵다. 주경업 부산민학회 회장은 "부산은 6·25전쟁 때 백척간두에 몰린 대한민국을 기사회생시킨 곳이자 우리나라가 다시 태어난 곳"이라고 말한다. 해방 후 오갈 데 없는 일본과 만주 지역 귀환동포를 품었고, 6·25전쟁 때는 8도에서 몰려든 피란민을 끌어안았다.

부산 시민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1월, 혹한이 예년보다 빨리 찾아오자 피란민과 화재로 집을 잃은 이재민에게 자기 집의 방 한 칸을 비워주는 운동을 펼쳤다. 위기 상황에서 자기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껴안은 부산 시민의 포용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부산 시민의 개방성과 포용성은 전쟁의 절망을 딛고 희망의 불씨를 지폈다. 이처럼 외지인에게 텃세를 부리지 않은 부산 시민의 기질 덕택에 수많은 피란민이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부산에 정착했다. 1949년 47만 명이던 부산 인구는 1955년 100만 명을 돌파했다. 6·25전쟁은 부산에 기형적인 도시개발의 후유증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텃세 없음'은 국내외 기업의 부산 유치를 비롯한 부산 발전에 적지 않은 자산이 되고 있다.

■고민보다 행동이 먼저(의협심, 저항정신)

부산 사람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한다. 야성(野性)이 강한 도시로 통한다. 1979년 10월 부마항쟁, 1987년 6월 항쟁처럼 한국 현대사의 고비마다 부산 시민은 분연히 일어나 항쟁의 횃불을 들었다.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여는 등 역사의 물꼬를 텄다. 부산은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박종철 열사의 고향이다.

문관임에도 임진왜란 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비켜주기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며 장렬히 전사한 송상현 동래부사와 '독도 수호신'으로 평가받는 안용복 장군은 의리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부산 사람의 의협심은 일본 지하철역에서 만취한 일본인을 구하려고 선로에 뛰어내렸다가 목숨을 잃은 '아름다운 청년' 이수현, 아프리카 수단 톤즈에서 의료 및 교육 봉사활동을 하다가 선종한 이태석 신부로 이어진다.

부산 사람의 욱하는 성격은 외지인에게 '터프'하고, 세련되지 못한 이미지로 비치기도 한다. '친구' '도둑들' '범죄와의 전쟁' 같은 영화에서 부산은 의리를 맹목적으로 좇는 '조폭(조직폭력배) 도시'로 잘못 그려지고 있다.

■단순함을 넘어 세계시민으로

부산 사람은 '서울깍쟁이'와 달리 계산할 줄 모른다. 단순 무식하다는 비판도 나온다. 지금도 부산 사람은 술값이나 밥값을 계산할 때 비용을 각자 부담하는 '더치페이(Dutch pay)'에 익숙하지 않다. 후배의 밥값, 술값을 챙기는 것은 선배의 몫이다.

이런 기질을 반영하듯 술 자리에 자주 등장하는 건배사 중 하나가 '우리가 남이가'이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화끈하게 몰아주는 부산 사람의 기질을 기가 막히게 표현했다. '우리가 남이가'는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남긴 말이다. 민주화 이후 '우리가 남이가'로 대변되는 부산 사람의 단순함은 한국 정치 발전을 막는 지역주의의 병폐가 되고 있다. 특정 정당의 공천만 받으면 막대기를 꽂아도 당선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부산의 정체성인 개방성을 훼손하는 패거리 문화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박재환 부산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포용성, 개방성, 저항정신 등 부산 고유의 정체성에 세계 유일의 유엔기념공원, 베트남난민수용소 같은 세계 평화와 인류애를 담은 세계시민정신을 더하고, '우리가 남이가'의 단순함을 빼서 부산의 미래지향적 정체성을 가다듬을 때가 됐다"고 말했다.


# 부산사람들의 역동성·신명이 독창적 야구장문화 탄생시켜

'아주라! 아주라!~'.

부산 사람의 야성(野性)을 보여주는 사직야구장. 야구를 좋아하는 부산 시민이 사직야구장의 쓰레기봉투 및 신문지 응원문화를 창조했다. 국제신문DB

부산 사직야구장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파울볼을 아이에게 주라는 부산 사투리다. 부산 사람이 아니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부산 사람의 기질을 엿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이 사직야구장이다. 부산의 저항정신을 상징하는 야성(野性)은 야구를 좋아한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흔히 사직야구장을 세계에서 가장 큰 노래방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부산 갈매기' '돌아와요 부산항에' 같은 부산을 상징하는 노래를 3만여 관중이 합창하는 광경은 전 세계 어느 야구장에서도 볼 수 없다. 부산을 통합하는 에너지로, 부산 사람의 신명이 잘 드러난다.

사직야구장의 응원문화를 한 꺼풀 벗겨 보면 '프로슈머'(Prosumer·참여형 소비자)로서 부산 시민의 문화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프로슈머는 생산자(Producer)와 소비자(Consumer)의 합성어로, 단순히 소비만 하지 않고 독창적인 야구장 문화를 만들어간다는 뜻을 함축한다.

차재근 부산문화재단 문예진흥실장은 '사직야구장 인문학'을 이렇게 편다. 주황색 쓰레기봉투를 머리에 쓰거나 폐신문지를 찢어 펼쳐 흔드는 응원 문화는 아주 독특하고 창조적이어서 창조도시 부산의 기반이 된다. 쓰레기봉투는 응원 도구로 사용된 뒤 경기 후 쓰레기를 담는 본연의 기능을 한다. 환경과 생태에 가치를 두는 문화의 흐름과도 맥을 같이한다. 특히 다른 사람이 주목하지 않는 것, 버려지는 것, 과소평가되는 것, 작고 약한 것을 창조의 도구로 삼는다는 점이 신선하다.


# 산복도로 옥상주차장에도 부산인 지혜가…

"누가 내 차를 옮겼을까." 부산 산복도로 옥상주차장을 본 어린이와 외지인이라면 스펜서 존슨의 베스트셀러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에 나오는 궁금증이 생길 것 같다. 6·25전쟁으로 전국에서 몰려든 피란민의 보금자리를 마련하느라 산 꼭대기까지 판잣집이 빽빽하게 들어서 산복도로가 조성됐다. 자동차가 보급되면서 산복도로 지역 주민은 지리적 특수성 탓에 심각한 주차난을 겪어야만 했다.

궁하면 통하는 법. 산복도로 주민은 발상의 전환을 시도했다. 지상, 지하 주차장이 아닌 옥상주차장이 바로 그것. 옥상주차장은 여건이 어려워도, 악조건 속에서도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부산 사람 특유의 기질이 반영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래서 옥상주차장을 관광상품화하자는 제안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