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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칭 부산중앙광장이 '송상현 광장'으로 명명되면서 콘텐츠를 채워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사진은 지난 10월 동래읍성 축제 때
연출된 '동래성 전투 재현 상황극'의 한 장면이다. |
- 부산 영웅이지만 대접 못받아
- 동래성 전투 재현극도 일회성
- 감동 주는 콘텐츠 발전시키면
- 부산발 신한류 지펴질 수도
송상현(宋象賢, 1551~1592). 조선 중기의 문신, 작가, 장수. 호는 천곡(泉谷). 동래부사로서 임진왜란 초기 동래성 전투에서 왜군과 교전 중 전사. 향년 42세.
송상현은 부산의 영웅이다. 하지만 부산에 '유(留)'하지만 '거(居)'하지는 않는다. 지역의 역사인물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떠 있다는 느낌. 부산의 영웅이라 말하면서도, 그를 잘 모른다는 얘기다.
송상현의 본관은 전북 여산(礪山)이고, 묘소는 청주에 있다. 임란 와중인 1595년 동래에 있던 묘를 문중에서 청주로 이장해 갔다. 1610년 청주에 신도비와 사당이 세워졌다. 그를 모시는 충렬사(충북 기념물 제16호)도 청주에 있다. 청주에서 송상현을 알뜰하게 챙기는 모습이다.
최후 임지인 부산에는 안락동 충렬사의 위패와 송공삼거리의 동상이 있으나 이렇다 할 감흥이 없다. 동래읍성 축제 때 펼쳐지는 동래성 전투 재현 상황극에도 송상현이 등장하지만 일회성이다.
부산 양정동 송공삼거리를 지나다 문득 '인간 송상현'을 생각했다. 싸우는 법을 배우지 못했지만 누구보다 잘 싸울 줄 알았던 사람. 함께 싸우다 숨져간 저 순박한 동래읍민들…. 그들 속에 송상현의 애첩 '섬이'와 '양녀'의 실루엣이 너울거린다. 송상현에게 애첩 2명이 있었다는 건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김섬(金蟾)은 함흥 기생이다. 뒤에 송상현의 첩이 되어 동래성에 머물고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마침내 성이 함락되고 송상현이 적에게 굽히지 않고 순절하자, 여종 금춘(今春)과 함께 관아의 담을 넘어 송상현 곁에 달려갔으나 적에게 사로잡혔다. 사흘 동안 그침없이 적을 꾸짖다가 끝내 죽임을 당했다'.(연려실기술)
'양녀(良女)는 김섬보다 젊고 예뻤다. 동래성 전투에서 왜적들이 사로잡아 범하려 하자 "이놈들, 어디에 손을 대려느냐!"하고 꾸짖으며 거절했다. 왜인들이 절부로 칭찬하고 일본으로 끌고 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양녀를 후시미 성에 살게 하고, 부녀자들의 풍기를 지도하도록 했다. 강화회담 때 양녀는 고국으로 돌아왔고 송상현을 위해 3년 복상을 했다'.(송동래전)
이들 둘은 청주 묵방산 중턱의 송상현 묘 옆에 나란히 묻혀 있다. 나라에서 내린 정려비에는 한소사(韓召史, 김섬), 이소사(李召史, 양녀)라고 적혀 있다. 소사는 과부를 점잖게 일컫는 말이니, 뒤늦게 성도 찾은 모양이다.
이들 애첩은 '인간' 송상현을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충신' '결사항전' '순절' 따위의 국가주의 이미지에 가려져 있던 인간적(사내다운!) 면모를 엿보게 하기 때문이다. 송상현 스토리텔링의 새로운 국면이다.
부산 전포동·양정동 일원에 들어서는 부산중앙광장의 공식 명칭이 '송상현 광장'으로 귀결되면서 송상현이 반추되고 있다. 부산시가 모처럼 광장 이름 한 번 잘 지었다는 소리도 들린다. 반면 송상현을 더 깊이 연구·조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번 기회에 '부산의 역사인물'을 누가, 어떻게 챙기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겠다.
공공장소의 이름을 짓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콘텐츠를 만들고 채우는 일이다. 동래성 전투 재현 상황극을 발전시킬 수는 없을까. '전쟁영웅 송상현'을 뛰어넘어, 지역과 시대를 초월해 감동을 안겨주는 '인간 송상현'을 그린 뮤지컬 또는 오페라로 말이다. 송상현 광장에서 연중 상설 공연이 된다면 금상첨화겠다. 그땐, 한·중·일 관광객들이 찾아와 부산발 신한류가 지펴질 수도 있다. 비록 꿈이지만, 이런 게 지역 콘텐츠다.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상임이사 chpark@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