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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 한량춤과 입춤의 대가였던 문장원 옹이 구순의 나이를 딛고 학처럼 춤추고 있다. 2007년 8월 국립국악원에서의 이 춤사위가 그의 마지막 공연이었다. 국제신문 DB |
- 양반춤 오롯이 녹인 故 문장원
- 춤을 추는듯 추지 않는 움직임
- 관람객 몰입·열광 이끌기 충분
- 市지정 무형문화재 승격 기여
- 추모·기록사업 활성화되길
한량(閑良)이란 말 속에는 묘한 부러움과 질시가 배어 있다. 한량은 '현직 없이 놀고먹던 양반'을 뜻하지만, 흔히 '돈 잘 쓰고 잘 노는 사람'을 일컫기도 한다. '잘 논다'를 살짝 늘어뜨려 '자알~ 논다'고 하면 경상도에선 싸움 날 수도 있다. 하여, 한량은 호협한 사나이의 별명이면서 위태로운 풍류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이 절묘한 간극을 파고들어 춤으로 승화시킨 것이 한량춤이다. 양반은 양반스러움을 자랑하기 위해 추었고, 광대들은 양반스러움을 풍자하기 위해 한량춤을 추었다.
한량춤 하면 곧장 떠오르는 인물이 고 문장원(1917~2012)이다. 마지막 동래 한량, 춤추는 처용아비, 진짜 노름마치(놀이판의 고수 중 고수)로 불리며 한 시대를 풍미한 춤꾼.
춤으로 세한도를 그리던 문장원은 지난 8월 22일 한 마리 학처럼 저 세상으로 훌쩍 날아갔다. 향년 95세. 오래 사셨는데도 허전하고 서운하다. 그가 그리워지는 까닭은, 진정한 한량이 사라진 시대에 진짜 한량이 보고픈 탓이리라.
문장원을 얘기하자면, 몇 날이 필요하고 몇 권의 소설이 쓰여져야 한다. 그가 있어 경상도 춤이 전라도 소리와 맞짱 뜰 수 있었고, 동래가 경상도 춤의 본향이 될 수 있었다. 그는 1967년 동래야류를 중요무형문화재로 만들었고, 동래학춤과 동래한량춤 등을 시지정 무형문화재로 끌어올렸다. 그의 삶 그 자체가 곧 부산 춤의 역사였다. 그의 몸속에는 콧대 높은 동래 예기들과 한세월 보내면서 춤에 종신했던 '짜'하던 동래 한량의 풍류가 그대로 고여 있었다.
그 장면을 잊을 수 없다. 2007년 8월7일 국립국악원 예악당. 허청걸음으로 무대로 나온 그가 지팡이를 모셔두고 뚝 멈춘다. 객석이 숨을 죽인다. 여윈 팔이 들린다. 고령의 관절이라 오금과 돋음의 폭이 좁아들었으나, 학이 걷듯 자연스레 밟히는 엇박은 저절로 추임새를 내뱉게 했다. 걸음을 뗄 땐 간결한 그림자가 그려졌다. 정중동(靜中動), 춤을 추는 듯 추지 않는 듯한 움직임. 시나위 가락을 한 올 한 올 세며 노니는 즉흥은 다시 볼 수 없는 최고의 명무였다. 당시 춤판을 기획한 진옥섭은 이 장면을 "구순의 텅 비운 몸으로 여백과 만나는 세한도"라고 했다.
이것이 문장원의 마지막 동래춤(입춤)이었다. 다행히 그때 공연 모습이 비디오로 남아 있다(www.tagstory.com/video/100127861). 백문이 불여일견.(다시 올 수 없는 시간을 되돌려준 기술문명에 경의를!) 그런데 숙제가 남았다. 저 어마어마한 몰입과 열광을 누가 어떻게 스토리텔링 할 것인가.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와 김진홍(동래한량춤 예능보유자) 명인이 문장원류를 잇고 있다지만, 비 오면 부서질 듯, 바람 불면 날아갈 듯 위태롭다. 추모 공연이 기다려지고 추모 사업이 아쉽다. 기록 작업도 필요하다. 1991년 '뿌리깊은나무'가 선구적으로 수행한 '민중자서전- 문장원 편'에 기막힌 스토리텔링 한 대목이 구술돼 있다. "허허, 동래 사람은 팔만 들어도 춤이 덴다 캤어."
문장원은 경상도 춤의 아이콘이자 부산 춤의 특급 콘텐츠다. 예인은 갔지만 예술이 오뚝 남았으니, 그에 대한 기억이 더 이상 풍화되기 전에 '한량춤탑' 하나쯤은 세워야하지 않겠는가. 부산의 스토리텔링은 아직 곳곳에서 목이 마르다.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상임이사 chpark@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