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역전 대화재 때 선행에 감사
- 시민이 세운 공덕비… 확인 안 돼
- 정확한 조사로 재건립 추진 필요
- 중구로 '기억의 공간' 조성 의견도

- 다큐·뮤지컬 제작 등 사업도 활발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리차드 위트컴(Richard S. Whitcomb·1894~1982년) 부산 미군군수기지사령관(준장). 6·25전쟁 폐허 속에서 '희망 꽃'을 피운 그를 이제 부산시민들이 기억해야 할 때가 됐다. 위트컴 장군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한국에 남아 전쟁고아를 위한 봉사활동에 일생을 바쳤고, 죽어서도 부산 남구 대연동 UN묘지에 잠든 '영원한 부산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부인도 부산에서 고교 시절을 보낸 한국인 한묘숙(87·서울 한남동) 여사다. 특히 오는 12일은 그가 한국에서 숨진 지 30년째 되는 날이다.

■공덕비를 찾아라

1953년 11월 부산역전 대화재 이재민들이 위트컴 장군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세운 공덕비. 김재호 부산대 교수 제공

1953년 11월 27일 부산역전 대화재로 하루 아침에 집을 잃은 부산시민들을 위해 위트컴 장군이 군수물자를 나눠주고 천막촌을 직접 지어줬다. 그가 베푼 선행에 도움을 받은 부산시민들은 부산역전 대화재가 발생한 지 1주년을 맞아 1954년(단기 4287년) 11월 그를 기리는 공덕비를 세웠다. 부산시민들은 공덕비에 '위트컴 장군은 우리들 화재민을 위하여 이곳에 학교, 산원, 교회를 짓도록 후원하여 주었다. 우리들은 영원히 그 공적을 찬양하는 바이다'는 글을 새겼다. 안타깝게도 위트컴 공덕비는 사진만 남아 있을 뿐 비석 존재 여부와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위트컴 장군 재조명 작업을 벌여온 김재호 부산대 문화콘텐츠개발원장(전자전기공학부 교수)과 강석환 용두산공원 부산타워 대표는 2일 "위트컴 공덕비가 어디에, 어떻게 세워졌는지를 조사하고, 시민 공감대를 전제로 필요하다면 다시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1962년 11월 완공된 부산 중구 대청동 메리놀병원의 애초 명칭은 '주한미군기념 메리놀수녀병원'이라는 사실을 아는 부산시민은 거의 없다. 진료소 수준의 '메리놀수녀의원'이 종합병원으로 거듭나면서 이름을 바꾼 것. 병원 신축이 공사비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자 위트컴 장군이 예하 미군 장병에게 월급의 1%를 공사비로 기부하게 해서 공사에 도움을 준 일과 무관하지 않다.

한때 메리놀병원 앞에서 국제시장과 코모도호텔로 이어지는 길이 '유엔로'로 불렸다. 이 때문에 현재 중구로(옛 유엔로)를 위트컴 장군을 기억하는 공간으로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부산대 다큐멘터리 제작

김재호 원장은 부산대 장전캠퍼스 조성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위트컴 장군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유튜브에 올려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그의 휴머니즘을 널리 알릴 계획이다. 김 원장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것이 그에 대한 고마움을 나타내는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한다"며 "나아가 대학 안에 위트컴 기념공원을 조성하는 등 그를 기억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부산 남구에 건립 중인 UN평화기념관에도 위트컴 장군을 기념하는 코너를 조성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는 위트컴 장군의 선행을 재조명하는 스토리텔링을 엮고 뮤지컬을 만들어 세계적인 관광상품으로 개발할 방침이다.


# 그가 그토록 아꼈던 부산, 카메라에 남긴 3000여 컷

왼쪽부터 목욕하고 있는 아이들, 영도다리 밑에서 점을 보는 지게꾼, 개울가에서 세수하고 빨래하는 사람들, 위트컴(왼쪽 두번째) 장군이 부대를 예방한 이승만(왼쪽 세번째)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있다.

여인들과 아이가 야외 언덕에서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음식을 조리하고 있다. ※ 출처:로저 마슈츠가 찍은, 하버드대학 피바디 박물관 소장 사진.

1952~1954년 위트컴 장군과 부산에 관한 기억을 담은 흑백 사진 3000장과 컬러 슬라이드 120장이 미국 하버드대학교 피바디(Peabody) 박물관에 소장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 사진은 6·25전쟁 당시 부산 군수기지사령부에 근무한 미군 로저 마슈츠가 찍은 것으로, 2003년 하버드대학에 기증됐다.

그는 위트컴 장군의 전속 사진 담당 병사였으며 짬짬이 시간을 내어 부산 시내와 피란민을 촬영했다.

하버드대학 피바디 박물관 홈페이지(www.peabody.harvard.edu/search)에 접속해서 'pusan'을 입력하면 로저 마슈츠가 6·25 전쟁 당시 부산의 모습을 찍은 70장의 사진을 검색할 수 있다.

아쉽게도 70장의 사진 중 위트컴 장군에 관한 사진은 단 한 장뿐. 위트컴 장군이 부대를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위트컴 장군과 당시의 시대상을 재조명하기 위해 하버드대학과 접촉해 나머지 사진을 입수해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


# '불타는 화염'이 기록한 부산역전 대화재

- 윤정규 소설집에 당시 상황 묘사
- '경찰국장, 진화 중단… 폐허된 부산'

- "불이 사방을 둥둥 떠다녀" 증언도

1953년 부산역전 대화재는 1950년대 전후 부산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아이콘이다. 작고한 원로 소설가 윤정규 선생의 소설집 '불타는 화염'(1979년·일월서각·사진)에 보면 부산역전 대화재가 묘사돼 있다.

'1953년 11월 27일 하오 8시30분경 발화한 화재가 모든 것을 삼켜버린 것이다. 불은 영주동 산비탈 판잣집에서 일어났다. 그 불길이 장장 열네 시간 동안 번지고 번져, 부산 번화가였던 40계단 부근과 동광동, 부산역 등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불가항력의 화재가 아니었다. 당시 경찰국장이었던 김모가 산비탈의 판잣집을 소탕할 좋은 기회랍시고 소방관들로 하여금 진화 작업을 중단하게 했고, 그 사이에 불은 바람을 타고 진화가 불가능한 대화로 커져버린 것이다. 폐허가 된 부산은 좀처럼 재건되지 않았다'. (263쪽)

위트컴 장군이 지어준 천막촌에서 생활한 이종철(65) 씨는 "하늘이 온통 시커멓고 불이 사방을 둥둥 떠다녀 불안에 떨었다"며 "천막 안에는 군대 내무반처럼 가운데 통로를 두고 양쪽으로 세 가구씩 여섯 가구 수십 명이 함께 생활했다"고 기억했다.

국제신문 ·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