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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4년 7월 29일 부산 메리놀병원 신축 기공식이 위트컴(앞줄 왼쪽 세번째) 장군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고 있다. 클리프 씨·용두산공원 부산타워 제공 |
- 후원 손길 필요한 고아원 등
- 예하부대와 결연 맺어 지원
- 전쟁 후 질병앓는 이들 위해
- 병원 세우는 데 가장 적극적
- "그의 헌신적 노력 없었다면
- 부산 재건은 훨씬 더뎠을 것"
리차드 위트컴 부산 미군군수기지(Pusan Military Post·PMP) 사령관(준장)이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음을 입증하는 선행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위트컴 장군을 재조명하는 데 앞장선 김재호 부산대 문화콘텐츠개발원장(전자전기공학부 교수)과 강석환 용두산공원 부산타워 대표는 18일 "전후 복구로 혼란스러웠던 1953, 1954년 그가 부산에 근무한 것 자체가 부산으로 봐서는 엄청난 행운"이라고 말했다.
위트컴 장군은 주어진 대한미군원조처(AFAK) 기금을 수동적으로 집행하는 차원을 넘어 부산 시민을 위한 일을 발 벗고 찾아다녔다. 기금이 부족하면 그는 예하 부대원의 월급 1%를 병원 신축 기금으로 헌금하도록 하는가 하면 도움이 필요한 부산지역 기관과 미군 부대 간 후원 결연 등 갖은 아이디어를 동원했다.
■갓 쓰고 이벤트…조산소 설치
위트컴 장군은 1954년 영도구 피란민촌에 산원(産院·조산소)을 설치했다. 그해 5월 피란민촌을 둘러보던 그는 배부른 산모가 보리밭에서 아기를 낳는 장면을 목격하고 이같이 지시했다. 피란민촌의 7, 8세대 40여 명의 가족이 함께 생활하는 천막 안에서는 아기를 낳기가 곤란했기 때문이다(부산 영도구청 '신문으로 본 영도의 발자취').
병원 건립 기금이 모자라자 그는 한복 차림에 갓을 쓰고 부산 시내를 활보했다. 병원 건립 기금 모금 행사를 홍보하고 부산 시민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미국 격주간지 '라이프' 1954년 10월 25일 자). 그는 부산 시민에게 도움이 된다면 사령관으로서 체면을 구기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후원의 손길이 필요한 부산지역 기관과 88개 예하 부대가 자매결연을 하고 체계적으로 후원하도록 했다. 부대 규모가 크면 두 개 이상의 기관을 후원하도록 했다. 특히 그는 예하 부대원에게 "부산지역 기관을 돕기 위해 자원봉사를 하거나 안 입는 옷, 선물, 돈, 기타 물품을 기부하라"고 지시했다고 미국 '성조지'(Stars and Stripes·1954년 1월 13일 자)가 보도했다.
■전후 복구 프로젝트
1953년 7월 6·25전쟁 휴전 이후 전후 복구를 위한 AFAK 프로그램이 시작됐다. 그해 11월 부산역전 대화재가 발생하면서 속도를 냈다. 위트컴 장군이 191개 AFAK 사업을 진행했다. 그는 화재 복구를 위해 한미재단으로부터 1만5000달러의 지원을 받아냈다. 국가기록원에서 찾아낸 위트컴 장군이 수행한 주요 AFAK 사업을 보면 ▷메리놀·침례·성분도·복음·독일적십자병원 등 병원 건립 지원 ▷이재민을 위한 후생주택 건립(영도 208동, 동래 210동 등) ▷보육원과 요양원 건립 ▷국제시장과 메리놀병원 주변 도로 개설 등이다.
그는 전쟁 이후 각종 질병에 노출된 아픈 이를 위한 병원 건립에 가장 주력했다. 덕분에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부산 지역 의료시설은 전국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강석환 대표는 "위트컴 장군의 헌신적인 전후 복구 노력이 없었더라면 부산의 재건은 훨씬 더뎠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세계 유일의 유엔기념공원은 1950년 착공됐지만 위트컴 장군이 완공했다. 그는 자신이 마무리한 유엔기념공원에 잠든 '영원한 부산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제신문 ·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