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발전소 직원들과 납품업체 사이에 '검은돈'이 관행처럼 오고갈 수 있었던 것은 처음부터 허술한 납품제도 때문인 것으로 드러났다. 엔지니어팀장(부장급)이 특정업체를 추천만 하면 수의계약이 이뤄지는 단순 구조여서 돈만 들이대면 납품권을 따낼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원전산업 특화로 신규 경쟁사가 생기기 어렵다 보니 이들의 밀월관계가 쉽게 드러나지도 깨지지도 않았다는 게 검찰의 분석이다.

■대부분 수의계약 방식

3일 울산지검에 따르면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과 지역 원전에 대한 납품은 일반적인 경쟁입찰이 아니라 대부분 수의계약에 의해 이뤄진다. 실무를 담당하는 원전 팀장(부장급)이 계약 상대방을 추천하기만 하면 사실상 납품업체로 선정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별다른 검증이나 여과 시스템도 없다. 문제가 있는 업체나 제품이라 해도 그냥 통과되는 셈이다. 팀장이 납품업체를 한 번에 결정하는 것과 같은 시스템이다. 구속기소된 월성원전 계통기술팀장인 정모(49) 부장은 이 같은 관행을 이용해 업체로부터 납품 대가로 1억8000만 원을 받았다.

■허술한 납품제도, 비리 부추겨

또 다른 문제점은 '현장기술개발과제'에 있다. 이 제도는 한수원이 특정업체를 추천해 설비나 부품을 개발하도록 한 뒤 '개발선정품'으로 지정하면 다년간 수의계약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개발선정품은 신제품이나 신기술, 친환경인증제품 등이 해당된다. 문제는 원전 부품의 국산화와 제작기술의 선진화를 위한 이 제도가 본래 취지를 살리지 못한 채 특정업체를 밀어주는 수단으로 악용됐다. 이는 수의계약을 권장하는 형태인데, 이런 구조이다 보니 납품·뇌물비리의 단초가 될 수밖에 없다고 검찰은 지적했다.

납품업체 2곳에서 1억1500만 원을 수수한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상 뇌물)로 구속기소된 고리원전 부장 허모(55) 씨가 이런 사례에 해당된다. 허 씨는 2009년 12월 프랑스 A사에서 수입한 밀봉 유닛을 국내 M사에 몰래 넘겨줬는데, M사는 이를 토대로 카피(복제) 부품을 만들었다. 이 카피 부품은 2010년 3월 한수원이 국산화 과제로 제안한 '개발선정품'으로 지정됐으며 특허청 특허인증까지 받아 고리 등 국내 원전에 납품됐다. 허 씨는 그 대가로 M사로부터 8000여만 원을 받았다.

■수사 어떻게 시작됐나

검찰의 이번 사건 수사는 시민 제보로 시작됐다. 지난해 9월 울산지검에 익명의 한 시민으로부터 제보전화가 왔다. "울산 남구의 모 은행 지하주차장에서 한 남자가 거액의 현금을 음료수 박스에 담아 포장하는 것을 봤는데 뇌물로 의심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검찰은 은행 CC(폐쇄회로)TV 자료를 바탕으로 인출자의 거래·통화내역을 확인한 결과, 한수원 납품업체인 A사 대표 이모(54)씨가 5000만 원을 인출한 것을 밝혀냈다. 이 씨가 이 돈을 고리원전 부장 김모(49) 씨에게 전달한 것도 알아냈다.

검찰은 이 씨에 대해 뇌물공여 혐의로, 김 씨에 대해 뇌물수수 혐의로 검거했다. 또 이들의 진술과 다른 제보자들로부터 한수원의 납품비리 전반에 대한 얘기를 듣고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 지난달 4일 원전 로비스트 윤모(56) 씨 구속을 시작으로 파상적인 수사를 벌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