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두산공원에 세워진 초량왜관 표지석.

일본 최초의 무역항인 규슈의 나카사키항은 조선 첫 개항지인 부산 중·동구의 부산포와 닮았다. 산비탈의 산복도로 지형이나 개항기 역사가 유사하다. 뚜렷한 차이점은 도심 재생 프로젝트가 '보존'과 '개발'로 나뉘는 것이다.

나가사키 시는 17~19세기 네덜란드 상인 거류지인 데지마(出島)를 50년에 걸쳐 15분의 1 크기로 복원했다. 메이지시대 매립된 땅을 다시 인공섬으로 만들어 옛 건물을 되살렸다. 지금까지 투입된 139억 엔(약 1800억 원) 중 10억 엔은 1996~2000년 국내외 개인·법인·단체에서 모금한 것이다. 2006~2008년 데지마를 찾은 관광객은 연평균 40만 명으로 나가사키 시 인구(45만명)와 맞먹는다.

반면 데지마보다 규모가 25배나 컸던 조선 유일의 대일 무역기지 초량왜관(33만㎡)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몇 차례 복원 시도가 있었으나 번번이 무산됐다. 부산대 김동철(역사학) 교수는 "초량왜관에 대한 기억 상실은 곧 부산 근대사에 대한 망각"이라고 지적했다.

부산은 왜 '근대부산의 뿌리'인 초량왜관을 내버려뒀을까. 강남주 조선통신사문화사업회장은 역사인식에서 원인을 찾는다. "일본이 초량왜관을 대륙침략의 기지로 이용했어요. 이것이 부산 지역사에서 만지면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로 잘못 여겨진 이유예요." 일본에 비해 국내의 왜관 연구가 한참 뒤처진 배경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초량왜관 터는 일제시대 '저항'의 공간이기도 했다. 부산 중구 동광동의 백산 안희제 기념관은 옛 왜관 자리에 피어난 독립운동의 생생한 자취다. 경성대 강동진(도시공학) 교수는 "침략과 저항의 공간인 초량왜관은 근대역사관광의 거점으로 손색없는 스토리텔링을 가진다"고 말했다. 대만의 타이베이나 타이난처럼 일제의 흔적을 문화와 청소년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주경업 부산민학회장도 "초량왜관 역사관을 세운다면 다른 도시가 흉내낼 수 없는 콘텐츠가 될 것"이라고 했다. 모두 '그때 거기'의 죽은 역사로 버려둘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현실로 복권시키자는 주장이다.

경기도의 수원화성은 초량왜관 복원의 '참고서'가 될 만하다. 1990년대 수원시는 '2020년까지 화성 복원에 2조 원을 투자하겠다'는 원대한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10여 년이 지난 현재 공정률은 25%대.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묶인 원주민들의 불만이 적지 않지만, 차근차근 문제를 풀어간 방식은 본받을 만하다.

데지마와 수원화성 복원은 ▷100년을 내다보는 장기 마스터플랜 수립 ▷구체적인 투자 로드맵 ▷민관 거버넌스 구축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