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문이 창간한 해인 1947년은 8·15 광복후 미군이 통치하던 이른바 미군정기였다. 우리 국민들은 36년간 일제의 잔재를 털어내면서 점차 안정기에 접어들던 시기였다. 이즈음 60년대 이후 경제성장을 주도할 기업들이 잇달아 창업하는 등 국내산업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부산지역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부산에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LG그룹으로 성장하게 될 락희화학이 그 해 창업 했고, 부산은 아니지만 현대그룹의 모태랄 수 있는 현대건설이 같은 해 서울에서 문을 열었다. 장차 부산을 세계 신발의 메카로 만들게 될 신발 업체들도 이때 잇달아 개업했으며, 지금도 순수 향토기업으로 남아 있는 조광페인트도 이 해에 창업했다.

작고한 구인회 회장이 47년 1월 부산 서구 서대신동 사무실에서 화장품을 만드는 락희화학공업사 창업식을 갖고 LG그룹의 토대를 놓았다. 당시 락희화학이 만든 이른바 '락희크림'은 큰 인기를 끌었다. 그 뒤 51년 공장을 부산진구 부전동으로 옮기고 플라스틱(합성수지) 사업에 뛰어들어 바가지와 대야 물통 등을 제조한데 이어, 54년에 연지공장을 건설하면서 치약을 만들었다. 치약의 대명사가 된 럭키치약은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회사를 국민기업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구인회 회장이 창업주라면 그의 장남 구자경 회장은 제2의 창업주로 불린다. 1970년 회장에 취임한 구자경 회장은 화학 전자 건설 등 다양한 분야의 기업을 키웠다. 락희화학은 74년 (주)럭키로 상호가 변경됐다가, 83년 금성사와 합치면서 럭키금성그룹으로 바뀌었고, 95년 LG그룹으로 정착된다. LG는 그뒤 2003년과 2004년 전선·전기 부문의 LS그룹과 건설·유통 부문의 GS그룹을 각각 분리하고 지금은 전자·화학 등을 주력 분야로 하고 있다.

LG가 창업한 해인 47년 5월에는 정주영 회장이 현대건설의 전신인 현대토건사를 설립, 현대그룹의 토대를 놓았다. 또 삼성의 이병철 회장은 이듬해인 48년 삼성상회를 삼성물산공사로 변경하면서 기업체제를 갖췄다. 한국 현대사를 이끈 3대 기업이 이 당시 자리를 잡기 시작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이때부터 부산에 신발업체들이 잇달아 문을 열면서 신발부산의 시작을 알렸다.

해방 당시 부산에는 신발업체로 삼화고무(범표)가 가동되고 있을 뿐이었다. 국제신문 창립(9월1일) 직전인 47년 8월에 태화고무공업사(말표)가 창업했다. 이 회사는 73년 태화고무(주)로 이름을 바꾸고 74년 증시에 상장하는 등 성장을 거듭했으나 80년대 이후 신발산업 사양화와 함께 어려움에 봉착, 마침내 94년 신발생산을 중단한데 이어 98년 부도가 발생하기에 이른다.

삼화·태화고무와 함께 부산지역 5대 신발브랜드로 유명한 국제·동양·진양고무도 이즈음 잇달아 문을 연다. 국제(왕자표)는 49년, 동양(기차표)은 53년, 진양은 63년 각각 창업했다. 현재 국제고무는 국제상사로 변신해 프로스펙스 상표의 신발을 만들고 있으며, 동양고무는 화승그룹으로 성장해 르카프 신발을 내놓고 있다. 진양은 신발은 포기하고 합성수지사업만 하고 있다.

현재 부산에 남아있는 향토기업 가운데 47년 창업한 기업으로는 조광페인트(주)를 들 수 있다. 창업주인 양복윤(작고) 회장은 부산진구 가야동에 조광페인트공업사란 회사를 세우고 페인트 제조·판매업에 뛰어들었다. 사업다각화 등으로 회사를 키우진 않았지만, 매출액의 5%를 연구·개발에 투자하는 등 끊임없이 기술 개발에 매진해 다양한 도료를 생산하면서 60년 이력을 쌓아왔다. 지난 98년도에는 IMF 위기를 맞아 전체 직원 500명 중 100여 명을 감원하는 등 어려움을 겪였지만, 99년 이후 정상화 돼 매년 이익을 내는 건실한 향토 기업으로 자리잡고 있다.

환갑이 지난 부산의 향토기업으로는 성창기업(주)(1916년 창업), 대선주조(주)(1930년), (주)한진중공업(1937년·옛 대한조선공사), 고려제강(1945년), 동일고무벨트(주)(1945), 대선조선(주)(1945년) 등이 있다.

부산상의 이규중 홍보팀장은 "47년 당시 많은 기업이 창업했지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기업은 몇 안된다"면서 "기업이 환갑을 맞는 것은 그만큼 지역사회에 많은 기여를 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이노성 기자 nsl@kookje.co.kr

일러스트=이재민 기자 eif2002@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