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비상사태 시 대형 상선들은 인력과 물자를 실어나르는 중요한 임무를 지닌 제4의 군입니다. 한진해운의 운명을 단순한 금융논리로만 결정하지 말고, 제발 국가안보 차원에서 살펴봐 주시기를 간곡히 읍소합니다."

한진해운의 법정관리 신청으로 발생한 글로벌 물류대란이 2주일 가까이 이어지는 가운데 외국 항만에서 가압류돼 오도가도 못하는 와중에도 국가안보 차원에서 한진해운의 운명을 살펴봐 달라는 한 선장의 숙연한 편지 내용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편지의 주인공은 법정관리 신청 직후인 지난달 30일 싱가포르항에서 압류되는 바람에 2주일째 발이 묶여버린 한진로마호의 문권도 선장이다.

문 선장은 한진해운 직원들과 정부, 국민 모두를 향해 보낸 편지에서 우선 "세계대전과 여러 전쟁에서 전략물자의 수송이 전쟁의 승패를 갈랐으며,미국의 세계 제2차대전 참전 이유 중 하나도 자국 상선대 및 화물에 대한 독일 유보트(U-boat)의 공격 때문이었다. 미국 상선대는 평시에는 화물과 여객을 수송하지만, 전시에는 해군에 징발되고 해기사들은 해군 장교로 임명돼 참전한다"고 외국 사례를 제시했다.

문 선장은 "우리나라도 국제선박 등록법을 통해 국가필수 국제선박을 지정해 놓고 있으며, 그 정의를 '전시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시에 국민경제에 긴요한 물자와 군수물자를 수송하기 위한 국제선박'으로 규정하고 있다"며 "우리나라 지정 국제선박은 총 88척이며 한진해운은 그 가운데 12척을 차지해 가장 많다"고 덧붙였다. 당장 한진해운이 사라진다면 필수 국제선박 중 14%가량이 없어진다.

문 선장은 또 "한진해운이 맡았던 구주항로는 현대상선이, 미주항로는 머스크와 MSC가 담당할 수 있다고 정부 측 인사가 발표하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 했다"며 "우리나라에 전쟁이 터졌을 때 국적선박이나 선사가 실효적인 선박 소유자가 아니거나 한국선원이 승무원이 아닐 경우 과연 한국에 오려고 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제4군 가운데 가장 많은 국가 필수선대를 운영하는 한진해운을 이대로 없앤다면 그 피해와 위험이 막중할 것"이라며 "한진해운의 회생을 위해 동분서주 중인 동료들과 응원을 보내 주시는 국민께 감사의 추석 인사를 드린다"는 말로 끝맺었다.

문 선장의 편지를 접한 한진해운 직원들과 해운항만 당국자들은 착잡한 심경을 숨기지 못했다. 10일 이상 외국 항만 정박해역에 발이 묶인 채 식수와 식량, 연료, 생필품 등의 온갖 어려움을 겪고 있을 압류 선박의 선장이면서도 개인적 어려움이나 추석 연휴를 앞둔 불안감 등 사사로운 감정을 일절 드러내지 않고 국가적 차원의 문제만을 언급한 것에 대한 숙연함이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해운 물류 업계에서는 '한진 뱃사람들은 결코 침몰하는 배에서 먼저 살겠다고 뛰어내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문 선장의 편지에서도 한진해운 직원들의 충성도와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며 "이런 각오와 마음 자세가 바로 자사를 세계 7위로 키운 저력이다. 이들과 이들이 일군 1위 국적선사를 잃는 것은 엄청난 국가적 손실"이라고 밝혔다.  이승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