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 세종과학기지 표지석에 기대어 선 이동화 대표.

- 사전 준비 소홀로 생필품 부족
- 현대 근로자들 물품 훔쳐 사용
- 알면서도 딱한 처지 이해 묵인
- 탁구·당구·비디오 감상이 오락

추운 날씨에 생필품은 태부족이었다. 이를 구하는 게 급선무였다. 현대건설 세종기지 건설단이 떠나기 전 내가 할 일은 분명했다. 바다에 떠 있는 '현대HHI- 1200호'에 밧줄을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생필품을 훔쳐올 수밖에 없었다. 1차 월동대가 남극 물정을 모르고 준비를 소홀히 한 탓이다. 넉넉한 생필품은 쌀뿐 모든 게 부족했다. 배에 올라가 물건을 훔쳐오지 않으면 월동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러니 도둑질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있나.

남극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도둑질의 대상이 됐다. 라면 계란 채소 간장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훔쳤다. 심지어 소형 냉장고도 빠지지 않았다. 극지에서 웬 냉장고라 의아해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남극에서 생활하려면 냉장고는 생필품이었다. 에스키모에게 냉장고를 판다는 게 마냥 거짓말은 아니었다. 부식을 바깥에 쌓으면 남극이라 저절로 냉동 창고 역할을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영상 1~2도에서 영하 20~30도까지 급격하게 오르내리는 온도 차는 음식물을 쉽사리 변질되게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나에게 도둑질하는 기술이 있는 게 아니었다. 현대건설 근로자들은 물건을 훔치러 가면 모른 체했다.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고개를 돌리는 그들의 그 따뜻함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훈훈하다. 부식이랑 생필품이 회사의 재산인 만큼 자진해서 줄 수는 없었다. 그저 모른 채 해주는 게 월동대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었다.

그들은 1차 월동대의 사정을 뻔히 알고 있었다. 동병상련이라고 했던가. 극지에서 고생한 게 그런 동지애를 느끼게 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오히려 사용하던 물건까지 아낌없이 주고 갔다. 너무나 고마운 그들의 행동에 동지애마저 느낄 정도로 가슴이 뜨거웠다.

도둑질도 마다치 않았지만 물자는 태부족이었다. 1년 치라고 가져온 담배는 3개월 만에 다 떨어졌다. 중국 기지에 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담배를 얻어왔다. 중국 대원들은 처음엔 거저 주더니 우리 월동대가 너무 자주 찾아가니까 나중에는 돈을 받고 담배를 팔았다.

1차 월동대는 지질, 생물, 기상 분야 과학자 4명과 전기, 설비, 의무, 주방 등 지원 분야를 합해 13명으로 구성됐다. 대부분 30, 40대였다. 이들의 남극 생활은 대체로 단조로웠다. 날씨가 좋을 때면 과학자들은 여러 가지 조사활동을 하다가 기상이 나빠지면 실내에서 지내는 일이 반복되었다. 지원 분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남극에서의 여름과 겨울은 천양지차다. 여름에는 활동하기도 좋고 위험도 적지만 겨울은 혹독했다. 밤이 긴 데다 추위도 견디기 어려웠다. 게다가 바람이 몰아치면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바깥에 쌓아둔 널빤지 등이 날아다녀 함부로 나다니지도 못했다. 하계대는 차수가 없지만 월동대는 위험한 만큼 차수가 붙어 있다. 2013년 27차 월동대가 남극을 갔으니 이제 제법 연륜이 쌓인 셈이다.

우리는 남극에서 환경을 보호하는 모범 국가가 됐다. 일부 국가는 기름을 함부로 버리고 물도 정화하지 않고 그대로 바다로 내보냈다. 자기네들이 사용한 생활 쓰레기조차 수거해 가지 않고 모두 불태우는 행태를 보였다. 어느 날, 세계적인 환경단체인 그린피스가 세종기지의 환경상태를 살피러 왔다. 그들은 우리의 생활상을 보고 엄지손가락를 치켜세웠다. 세종기지에서는 세제를 비롯한 모든 오염 요소는 정화 과정을 거친다. 깨끗한 물을 내보내고 쓰레기는 모두 되가져가니 그들이 칭찬하는 것은 당연하다.

남극에서 할 수 있는 오락 거리는 탁구와 당구 그리고 비디오 감상이 전부였다. 그것도 잠시였다. 남극의 강한 바람 탓에 건물의 기초가 약간 틀어져 바람에 흔들렸다. 그래서 탁구대와 당구대의 네 다리는 균형이 맞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내게 천행이었다. 제대로 당구를 쳐 본 적도 없는 초보인 내가 운이 좋으면 고수를 이기는 이변을 연출했으니 말이다.

영화나 드라마 비디오테이프도 몇 개 되지 않았다. 보고 또 보고 반복하다 보니 나중에는 테이프가 늘어나 버렸다. 몇 번이나 본 것이지만 그걸 볼 수 없는 것도 큰 아쉬움이었다. 어떤 때는 영화감상보다 한글자막 틀린 글자 찾아내기로 시간을 때우기도 했다. 남극의 겨울은 그렇게 무료했다.

월동대 생활이 5개월쯤 지났을 무렵 본국에서 한 통의 전보가 날아왔다. 펼치니 '축 득남'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감격에 젖어 아들 이름을 짓기 시작했다. 내가 남극과 처음 인연을 맺었으니 아들은 남극에서 대한민국의 기개를 떨치라는 의미의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다. 고민 끝에 '남극을 혁신하라'는 문구의 앞글자를 따 '남혁'이라고 짓기로 했다. 훗날 얘기지만 집안 어른의 반대로 이 이름은 결국 쓰지 못하고 말았다.

남극에 있으면서 막 대통령에 취임한 노태우 대통령에게 남극에서 편지를 썼다. 겉봉투에는 대한민국 청와대라고 주소를 썼다. '대통령 각하, 아마 이 편지가 대통령께서 받은 취임축하 편지 중 가장 멀리서 온 편지일 것입니다. 남극은 대한민국의 미래에 많은 도움을 주게 될 것입니다. 부디 남극에 더 많은 애정과 관심을 가져 주십시오'. 대략 편지의 내용은 이랬다. 편지의 경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두 달 뒤쯤 답장이 왔다. '대통령 노태우'라고 적히고 사인이 들어간 편지를 받았다. 편지엔 '관심을 갖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남경엔지니어링토건 대표